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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낙 Jan 08. 2025

요즘엔 들을 건 많은데 들을 게 없다.

푸념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 형편이 좀 나아질 때, 한 90년대 초중반인 것 같다. 그때 우리 집 거실에는 200만 원 전축(오디오세트)이 있었다. 아빠는 200만 원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 일요일 아침 8시마다 송골매 노래로 나의 아침을 깨웠다. 당시에는 굉장히 시끄럽고 짜증 났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송골매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 누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팬이었고,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좋아하는 감성 소녀였다. 가요 톱 텐보다는 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뮤직 타워를 밤새 녹화해서 소장했고, 인기가요 테이프보다는 나우 시리즈를 모았다. 그리고 건즈 앤 로지즈, 콘, 림프비즈킷, 오아시스 등 락밴드 사진을 스크랩해서 모았다. 당시 장래 희망이 팝 기자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자연스럽게 나도 누나의 영향을 받아서 락 음악을 좋아했다. 명절에 용돈을 받으면 일부 엄마한테 뺏기고 남은 1~2만 원으로 테이프를 샀다. 또래 친구들은 알 수 없을 법한 외국 락밴드 테이프가 책상 한편을 차지했다. 음반들을 볼 때마다  이런 멋진 걸 갖고 있어라는 마음으로 매우 뿌듯했다.

8090 주점 하시는 형님한테 기부했던 아까운 테이프들...내가 왜 줬지..?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소리바다와 윈앰프가 생겼다. 이제 테이프나 시디를 사지 않아도 컴퓨터만 켜면 거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큰 누나는 윈엠프로 음악 방송을 했고, 어깨너머로 많은 음악을 들었다. 누나와 나는 mp3를 다운로드해서 장르별로 정리했다. 그중에 너무 좋은 앨범은 시디로 샀다. 날이 갈수록 라이브러리는 두툼해졌다. 나만 알 것만 같은 느낌, 요즘 말로 홍대병, 중이병 비슷하게 그 라이브러리들이 나를 대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128메가짜리 MP3 꽂고 등교할 때 나는 커트 코베인이고, 시드 비셔스였다.

추억의 윈엠프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내가 전역할 때 스마트폰이 보편화 됐다. 스마트폰 하나면 손가락 까딱까딱 몇 번으로 어디서든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검색 몇 번으로 좋아하는 척하면서 취향을 조작할 수 있게 됐다. 앨범을 1번부터 보너스 트랙까지 통으로 듣는 건 지루해졌고, 곡의 기승전결보다 하이라이트 몇 초만 듣고 플리에 넣을지 말지 고민한다. 그 고민을 대~충 끝내고 나면 쏟아져 나오는 노래들 사이에서 허우적 대다가 과부하가 온다. 그래서 내가 뭘 들었는지 그 노래가 누구 노래인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요즘엔 들을 건 많은데 들을 게 없다. 요즘 노래는 운동할 때 일할 때 카페 술집 혹은 쇼츠 등의 비지엠 정도로 소비된다. 매클루언의 말처럼 가벼워진 미디어(전달방식)와 함께 음악자체도 가벼워져버린 것 탓에 곡하나하나에 대한 애정도 가벼워져간다. 마치 대만 카스테라, 탕후루, 요아정처럼 스쳐지나간다. 이런 분위기가 나쁘다고만 할 순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서운한 건 사실이다.


 서운한 마음의 원인이 흰털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 나의 탓인지, 시대의 탓인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리워하는 전축과 테이프, mp3도 LP세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볍고 서운한 매체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가볍고, 편리해질수록 아우라도, 감동도 사라진다. 편리한 게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나이들수록 느낀다. 요즘엔 좋아하는 척하기가 너무 쉽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게 벼슬은 아니지만, 나만의 것이 어딘가 모르게 무색해지는 것... 그게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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