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공감 못해주겠어요

[싫은책] 어쨌든 당신의 아내보다는 많은 걸 누리셨거든요

by 시은

다니엘 월러스의 『큰 물고기』를 읽었다. 팀 버튼의 영화 <Big Fish>로도 영화화된 그 이야기.




말하고자 하는 주제만 보면 심플하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진짜 인생을 알고 싶어 하는 아들이 듣게 되는, 아버지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연못에서 노는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표지에 이미 모두 설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뛰쳐나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일즈를 하여 큰 성공을 이룬 세일즈맨이다. 그리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성공을 하긴 했지만 ‘위대해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이제 돌아가시면 영원히 아버지에 대해 알 수 없게 되므로.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아들과,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며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진실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 아버지는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위대했음’을 다양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증명하려 한다.


자신의 진짜 인생을 알고 싶은 아들에게, 진짜 대신 환상이 가득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아들이 너무나도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도, 그는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벽을 넘어올 수 없게 환상으로 방어하면서, 그게 자신의 유머감각이자 센스라고 치켜세운다.


이런 식이다. 아버지의 주치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오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묻는다.


p.169

“베넷 선생이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어요. 방에서 나오시면서 아주 걱정스러워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내가 웃기는 농담을 좀 했거든.”

그는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해준다는 듯 은밀하게 말했다.

“농담요?”

“의사에 관한 우스갯소리 말이야. 그런데 아마 좀 심했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옛날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이제 59초밖에 더 못 살겠어요 ―잠깐, 1분만 더 기다려요.”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제 동생이 볼펜을 삼켰어요. ―그럼 연필로 써요.

(……)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이빨 한 개 빼는 데 2초밖에 안 걸리는데 30불이란 말이에요? ―원하시면 두 시간 걸려 빼드리지요."

(……)

“이제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네? 그 바보 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시라고요.”

“바보 같다구?”

“아니,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고맙다.”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두요. 제발 대화 좀 해요. 남자 대 남자로, 아버지와 아들로 말이에요. 이제 이야기는 그만 하시구요.”


p.175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아무런 꾸밈없는 본연의 그였다. 가면 하나를 벗기면 또 하나의 가면이 있고 그리고 또 가면, 또 하나 더―그 아래 어둡고 아픈 곳, 그 자신도 나도 이해 못 하는 그의 삶이 있었다.


p.215

어머니는 집에서 나를 길렀고 나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더욱더 열심히 일을 했다.(......) 아버지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이 가족답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예 따로 살까 하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

그가 막 마흔 살로 접어들던 어느 날,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느 장소에 머물게 되었다. 스펙터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p.230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간에 그녀가 서 있었다. 스무 살이 됐을까 말까. 길고 검은 머리를 뒤로 땋아 내린, 아주 잔잔하고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여자였다. 이런 늪 속에 살면 지금의 그처럼 지저분하고 끈적거리는 물질이 온몸에 덮여 있을 것 같은데 여자는 목 옆 쪽에 가느다란 검은 재가 한 줄기 묻어 있을 뿐 흰 피부와 원피스는 완벽하게 깨끗했다.

(……)


p.234

이 이야기는 이렇게 되어간다. 아버지는 처음에 스펙터와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제니 힐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이상한 것이다. 제니 같은 여자가 왜 갑자기 아버지야말로 자기가 고대하던 남자라고 결정지었을까? 아버지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었길래?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아버지의 매력 때문일까? 또는 정말로 제니 힐과 에드워드 블룸은 천생연분으로 태어난 것일까? 아버지는 40년을 그리고 제니 힐은 20년을 기다려서 결국 각기 자기의 남자, 여자를 만난 걸까?

(……)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제니는 여행 세일즈맨 에드워드의 어린 신부가 되었다.



아버지 에드워드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어린 나이에 설득술로 이미 거인을 정복했고,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람이라(결혼을 한 상태였고 가정을 이루어 아내와 자식이 있었으면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던 작은 시골 동네의 스무 살 어린 신비로운 여성 ‘제니’와 살림을 차리고, 맨손으로 흉폭한 개를 물리치고, 홍수를 피하게 해서 사람들을 구한, 그런 모험 가득한 멋진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지만 제니 힐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나오고 나서,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된 아버지가 집에 오면 슬프고 피곤해하고 아무 말도 없어진다고 나온다.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가슴 뛰는 모험을 하지 못하고,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남자이자 아버지의 서글픔. 이 세상에 있었을 ‘모험’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 그의 슬픔.


모험까지는 못 누렸어도, 전 세계를 여행하고 세상을 누렸던 게 '큰 물고기가 되고 싶었던' 에드워드의 삶이었다.


소설 속에서 에드워드의 일생에 대한 그의 아내, 샌드라의 생각 따윈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샌드라의 입장에서 보면 세일즈를 하기 위해 몇 달씩 집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서 육아와 살림을 전부 떠맡아야 했고, 심지어 자신이 육아를 떠안은 동안 남편은 어느 지역에선가 짧은 시간이지만 새파랗게 어린 다른 여자와 살림도 차린 적이 있었다. 그 여자가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신비로운 여성'이건 뭐건 샌드라가 알게 뭔가.


그녀는 젊었을 적에 오번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쩌면 알라바마 주 전체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샌드라 케이 템플턴'이었는데.


심지어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어느 재능 있는 숭배자는 노래로 칭송한 적도 있었다.


그뿐인가. 그녀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투나 자동차 경주, 음주 소동, 주먹다짐이 일어났고 한 명의 청혼자를 거절하면 곧이어 다른 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해 청혼하면서 꽃과 노래를 선사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었으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바로 그 '샌드라 케이 템플턴'이었는데.


훗날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할 동안, 그녀는 세계를 돌아다니거나 무언가를 누리기는커녕 번잡스러운 일상을 해결하느라 자신의 삶에서 젊음이 어느새 모조리 소진되고 만 것을, 어느 날 문득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생각해볼 여유도 갖지 못한 채.


에드워드가 아들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겠다. 거장인 영화감독의 선택을 받은 보편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매력적인 이야기인 것도 알겠다. 그렇지만 그 마음에 응원을 해줄 수는 없는 작품이었다.


희한하게, 팀 버튼의 영화에는 아빠의 혼외 로맨스 이야기, 그리고 그가 어딜 가서든 인기남이었음을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전부 빠져있다. 아빠가 가족 때문에 젊은 시절 좀 더 모험하지 못했던 아쉬운 마음, 그리고 이제 죽음을 앞둔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아들의 마음에 집중했다. 이게 천재 감독의 저력일까. 책은 싫었으나 영화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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