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를 지웠어, 라는 대사에 대하여
https://youtu.be/9DGX7vCX9s0
나나: 오늘, 나 당신한테 좀 미안한 짓을 했어. 애를 지웠어.
태호: 뭐?
나나: 고장난 몸뚱아리를 지키려면 약을 먹어야 하거든. 나 진짜 이기적이지. 미안해.
태호: … 아기는 너 다 낫고 난 다음에 가져도 늦지 않아. 미안해하지 마.
나나: 이해해줘서 고마워.
(재킷을 걸치고 문앞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나 바람 좀 쐬다 갈게. 호텔에서 잘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모범형사2, 2화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이자 대기업의 이사인 나나는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고 싶어하는 재능있고 욕심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당뇨 때문에 시간에 맞춰 인슐린을 투여해야 한다.
어느 날,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나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거의 곧바로, 임신중단수술을 한다. 남편인 태호에게는 애를 가졌었지만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지웠다, 라고 캐쥬얼하게 통보한다. 사과를 하기는 하지만.
몇 년 전, 공모전 아카데미를 다니며 공모전 시나리오 대본을 쓸 때였다. 내가 만든 캐릭터 중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다. 가정 환경이 좋지 못해서, 출산하더라도 아이의 양육을 잘 할 수 없는 상황인 여자 캐릭터. 그래서 그 캐릭터가 임신중단을 선택한 상황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같은 수강생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던가. 왜 어떻게든 낳아서 키워볼 생각도 안 하고 임신중단이라는 행동을 취하는지, 모성애가 없는 인물이 왜 주인공인지, 왜 이런 인물의 서사를 쓰려고 하는지.
한 생명을 지우면서까지 이 인물이 하려는 일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지, 싸가지없다, 이런 인물은 싫다, 등등등등.
합평의 맴매을 늘씬하게 맞고 나는 이 시나리오를 합평에 내는 것을 중단하고 말았다(그냥 몰래 쓰다가 접었다).
모범형사2에서, 일정 부분 악역이라고는 해도, 배우자인 남편보다 경제적 권력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여자 캐릭터가 배우자의 동의 없는 임신중단을 하고 이렇게 쏘쿨하게 ‘미안, 애 지웠어.’ 라고 말을 한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보통 이런 문제에서, 많은 여자 캐릭터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거의 뭐 죽을 죄를 진 것 같은 태도였다. 예전에 무슨 드라마는 여주인공이 사고로 유산을 한 것까지 시집에 죄송해했다(아주 옛날 드라마이긴 하지만).
오래전, <학교>(1999)라는 드라마에서 배두나의 친구로 나오는 고등학생이 임신을 해서 배두나와 함께 임신중단수술을 하러 병원에 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각종 미디어에서 그 선택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어떻게 학생이 임신을 하냐, 또 어떻게 임신중단을 하냐.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 당시에 어리기도 했고 성인지 감수성이 높지 않았던 때라 임신중단을 한 그녀의 선택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다.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언짢았다. ‘저 언니, 이기적이네. 뭐 얼마나 잘 살려고 저러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23년이 훌쩍 지나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그 드라마 속 인물의 선택이, 어렸던 고등학생으로서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작정 낳는다고 해도 제도와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육아를 거들어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사회적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데다 원가족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는 10대 여성이 도대체 뭘 해서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는 속으로 모범형사2에서 천나나라는 인물을 보며 ‘이 캐릭터, 별로야.’ 할지도 모르지만, 임신의 유지에 대한 결정권이, 임신의 주체인 그 여성에게 있다는 게 놀랍도록 선명하게 표출된 작품이었다.
아, 이제 이런 말을 하는 캐릭터가 나와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긴 했구나, 하는 게 소름이 끼치게 잘 그려졌달까.
우리가 숨쉬는, 진짜 현실에서까지 완벽하게 퍼진 분위기는 아니겠지만 이제 임신의 유지 여부는 국가나 남자 파트너의 동의가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인 여자가 선택하는 거라고, 조금은 캐쥬얼하게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내 입장에선 소름끼치도록 선명하게 보여준 드라마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오래 전 몰래 쓰다가 완성하지 못한 그 이야기를 이제는 완성해봐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