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Dec 08. 2023

학폭 세계관에 떨어진 세 여자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엄마

나는 아무래도 마마걸인 듯 싶다.


엄마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미워하느라 엄마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것도, 너무 많이 한다.


거의 일하고 밥 먹고 남는 시간 내내, 생존을 해결하고 남는 나머지 시간 내내 하는 것 같다.


어릴 때 엄마가 나한테 한 모진 말과 행동들을 생각하면 몇 년 전까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너무 빡쳐서.


엄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TV 미디어에 묘사되는 모성애는, 그냥 어디 저기 어느 먼 별나라에 있는 이야기 같았다.


 ‘엄마’라는 그 지위가 사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단한 것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닌데도 나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그녀에게 부여해 주는 ‘엄마’라는 지위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녀는 나에게 함부로 대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      


그래서 오랫동안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0대 중반을 넘은 지금이 되어서야 그녀가 내게 했던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한 말과 행동들이 보인다. 엄마의 말과 행동만 보였는데, 나의 말과 행동이 같이 보인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 깨달아진다.


지금보다 어렸던, 그리고 순진했던 때의 나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한테만 함부로 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의도치 않게 그녀의 고통을 방관하는 사람의 포지션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방관하는 자가 있다는 고통. 그게 내가 그녀에게 준 고통의 방식이었다. 어렸던 나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알았다고 해도 당시 어렸던 내가 딱히 뛰어난 방법을 찾았을 것 같지는 않다.


학폭이라는 세계 속에서 방관자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서, 아무 폭력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한다.


가해자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방관자가 폭력에 힘을 실어주는 존재처럼 느낀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이해하기 쉽게 학폭 세계관 속에 엄마와 나, 할머니를 떨어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엄마는 고1, 나는 중1이고 우리는 친자매이고, 할머니는 그냥 어떤 고3이라고 하자. 그렇다 치자.


 우리는 중고등학교가 붙어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고 엄마는 고등학교에 입학(=시집을 온 순간)한 순간부터 어느 고3선배(=할머니)에게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한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 주기, 삥 뜯기, 온갖 자질구레하고 번거로운 심부름(할머니는 친척들 앞에서 엄마 흉을 보곤 했다. 아빠가 백수일 땐 엄마에게 이웃에 가서 돈을 빌려오라고 시키곤 했고, 아빠가 취업한다고 빈둥거리는 동안 할머니 부부와 4자녀, 시할머니까지 7인의 식사와 설거지, 청소, 빨래 등등을 해야 했다. 그것도 세탁기도 없이)까지.


 자, 나는 엄마의 동생이고 한 핏줄을 나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이고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언니(=엄마)가 어떤 고3언니(=할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이제 겨우 중학교에 입학한 나한테 고3인 어떤 멋진 언니가 나타나서 되게 잘해준다. 사실 나는 별로 안 예쁜데, 너무 예쁘다며 이런저런 먹을 걸 챙겨주고, 고민상담도 들어주고, 이상한 애가 추근거리면 대신 혼내주기도 하고 친구들을 못 사귀는 것 같으면 친구들에게 먹을 걸 사주며 이 아이랑 같이 놀아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나한테는 너무 멋지고 고마운 언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언니가 자기 학교 선배 중에 진짜 개싸이코 미친 여자가 있다고 하면서 이름을 말해주는데 그 여자가 나한테 잘해주는 멋진 언니다. 나는 언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한다.


  “말도 안 돼. 그 언니가 얼마나 멋진 언닌데. 언니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언니는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결국엔 나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지금 니가 누구 편을 드느냐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고3언니는 나쁜 언니가 아니다. 너무 멋진 언니라 그 언니의 단점이나 어두운 면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 멋진 언니(=할머니) 편을 든다.     


언니(=엄마)는 멋진 언니가 아니라 개 미친 사이코라고 말을 하지만 나는 절대 그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는다. 언니는 답답해하다가 입을 다물고 만다. 아마도 공감능력 없는 나를 속으로 경멸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매점을 가는 길에 언니와 멋진 언니가 함께 있는 것을 본다. 멋진 언니가 언니에게 말한다.

  

 “OO아, 1000원 줄 테니까 매점 가서, 바나나우유랑 호떡 좀 사가지고 와, 여기서 기다릴게, 알았지? 빨리 갔다 와야 해~?”     

 

학교 매점에는 호떡을 안 판다는 것은 전교생이 알고 있는데 멋진 언니는 지금 우리 언니에게 호떡 심부름을 시키고 있다. 그것도 달랑 천원을 주면서. 고3이면 이 학교를 오래 다녀서 모를 리가 없는데,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나? 아니면 무슨 상황극 같은 걸 하는 건가?


햇병아리인 나는 아직 눈치가 없다. 다만 두 사람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두 사람이 모르게 얼른 학교 밖에 있는 호떡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호떡을 사 와 멋진 언니가 기다리는 곳에 가 호떡을 준다.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에 멋진 언니는 조금 놀라지만 나를 칭찬하고, 그때 매점에서 바나나우유만 사서 나오던 언니가 호떡을 사 온 나를 불편한 시선으로 본다. 멋진 언니가 나를 칭찬하며 동시에 언니를 비아냥거린다.


 “얘, 넌 이 어린 애도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니? 어디 모자란 것도 아니고. 됐다, 가라.”     




 나는 내가 멋진 언니가 필요한 것을 채워준 것 같았고, 언니의 위기를 해결해준 것 같았고, 멋진 언니의 말이 나를 칭찬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복기해 보니, 사실은 나를 칭찬하려는 목적보다, 언니를 깔아뭉개기 위해 한 말이었다. 깎아내리려고,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런 걸 몰랐다. 다만 나는 멋진 언니랑도 잘 지내고 싶고, 언니랑도 잘 지내고 싶을 뿐이다. 나에겐 둘 다 너무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언니를 위로한다.      


 “언니…. 그 언니 이제 고3이잖아. 대학 가면 얼굴 볼 일(=저승 갈 날. 오래 사시길 바랐으나 많이 늙으셨으니 살 날이 얼마 안 남으셨을 거라 생각했다)도 없을 텐데 언니가 좀만 참아, 언니가 훨씬 더 예쁘고 착해서 그 언니가 질투해서 그런 거야.”     


괴롭힘을 덜어주는 대신 참으라는 말을 했다니. 나로서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로서는 할머니와 편 먹고 멕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나한테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어릴 땐 엄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내가 한 말과 행동들 역시 엄마가 나를 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의 딸이었다고 해도 그게 당신에게 어떤 정서적 만족감과 행복을 주지 못하는 존재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왜 널 먹이고 키우고 청소와 빨래를 해줘야 하는 거지? 내가 너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너한테 내 딸이라는 지위를 줬지만 나는 그게 너무 아까워. 니가 정말 딸다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그녀의 고통을 존중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어려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멋진 언니(=할머니)가, 모두(=엄마)에게 멋진 언니는 아니었구나 라는 걸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는 내 말과 행동 때문에 엄마가 그랬겠구나 이해가 된다.


이제야 내가 그녀에게 한 말과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들거나 사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미 엄마는 나를 기르면서 불필요한 죄책감을 너무 많이 심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그녀 잘못이 압도적으로 클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내 잘못과 그녀의 잘못은 저울에 올리면 비슷할 것이므로, ‘우리 이제 퉁 치면 되겠네.’

하는 마음이다.


 더는 미워하지 말자, 사과받을 생각도 하지 말자. 이런 생각.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성숙했고 나보다 어른이었고, 그러므로 조금만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떠나 어쨌든 내가 당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었고 성인인 당신이 어린 나에게 충분히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랬더라도 나는 못 알아들었을 것이고 내 말과 행동은 당신의 노력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이해 못 했더라도, 만약 노력을 했더라면 지금쯤은 당신이 한 노력에 뒤늦게라도 감사해하며 이렇게 당신과 인연을 끊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후. 이렇게 다시 또 ‘그녀가 노력했길 바라는’ 이런 내 생각마저도 어쩌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그녀가 젊었을 때 통과하던 그때의 시간보다 감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법과 중요성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와 콘텐츠들이 나와있고 또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절이다. 하지만 그녀의 젊은 시절엔 이런 게 딱히 없었고, 무조건 인내만 강요하고, 그게 미덕인 시대였다.


나는 지금의 기준을, 과거의 그녀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멋진 언니는 7년 전에 죽었다. 언니를 괴롭히던 그 못된 언니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언니는 여전히 멋진 언니고, 언니에게 그 언니는 여전히 개미친 싸이코 여자일 뿐이다. 동일한 한 사람에 대해 이토록 극단적으로 양끝의 감정을 품고 있는 우리는 결코 화해할 수가 없다.


하긴 가해자가 죽었다고 해서, 피해자가 입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방관자 혹은 동조자였던 내가 아무리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피해자였던 그녀가 분노를 꺼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엄마, 화난 거 알겠어요.

근데 있잖아,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엄마가 느끼기엔 부족했을지 몰라도 난 정말 할 만큼 했거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