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하는 밈을 대하는 나의 자세
트위터에서 “엄마, 나 낳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는 밈이 화제였던 적이 있다.
저 말은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고 인생을 갈아 넣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을 엄마에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는 엄마의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반으로 자르고, 그 마음의 앞면과 뒷면을 나누어 본다. 그렇게 나누어서 읽다 보면, 저 문장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문장 뒤쪽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가 아니라 문장 앞쪽의 ‘엄마, 나 낳지 말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딸들은 어려서부터 작은 죄책감을 마치 무슨 애착인형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내가 태어나고, 나를 기르고, 나를 챙기느라 엄마가 자신의 삶을 손에 움켜쥐지 못하는 걸, 눈앞에서 원하는 걸 포기해야만 하는 걸, 딸들은 똑똑히 보고 자란다. 그리고 마치 그 선택의 원인이 나 때문인 것처럼 느낀다. 엄마의 불행이 나 때문인 것 같은 죄책감은 우리를 평생 따라다닌다. 하지만 내 남동생은 내가 느끼는 엄마의 불행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게 안 맡아지지?’ 싶을 정도로.
‘엄마에게 무슨 기회가 있었어?’
‘엄마가 집에서 해야 의무들이 있는데 어떡해.’
남동생이 보기엔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은 엄마의 사회 활동들, 엄마의 친목관계와 거기서 엄마가 친구들로부터 얻는 정서적 응원과 가끔 운 좋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도움이 되는 일들. 아마 동생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겠지만 내 눈엔 그 실낱같은 기회들이 보였다.
어쩌면 엄마가 가질 수도 있었지만 여러 여건 때문에 결국 흘려보내야만 했던 작은 기회들. 그 상황에서 느껴야 했을 박탈감. 당연히 아빠 지분도 있고 동생 지분도 있는데 이 모든 게 나 때문인 것만 같은 느낌.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애착인형.
자기 힘으로 돈을 벌고, 일을 하고 싶은 마음. 오랜 시간 노력하여 일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린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서, 살림을 해야 해서, 놓쳐야만 했던 사회경제적 기회.
그렇게 계속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경제활동에서 제외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고,
억울함이 쌓이고 우울함을 느끼고,
가끔 그 분노를 딸에게 해소하고.
아니, 자주 해소하고.
아니, 매일 해소하고.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해소하고.
엄마, (이럴 거면) 나 낳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가 아닐까 싶은 이 비뚤어진 재해석.
출처: 트위터
내가 느끼기로는 엄마는 거의 항상 소소하게 불행했다. 내가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하고, 타인의 감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항상 느껴졌다. 엄청나게 대단한 불행은 아니지만 엄마는 지금 불행하구나. 미세한 떨림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불행하구나.
그리고 엄마는 언젠가부터 내가 무얼 하든, 그게 얼마나 사소한 것이든, 시시콜콜하게 나를 저지하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별 거 아닌 일에도, 심지어 잘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을 해도 저지하고 야단을 쳤다.
제일 기억에 남는 ‘하지 말라는 것’ 중 하나는 공부였다. 시험 성적이 평소에 비해 ‘너무’ 잘 나오면, 공부도 ‘너무 잘하지는 말라'라고 했다. 뭐가 됐든 너무 잘하지는 말라고(그런데 그게 막 엄청나게 전교 1등 이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균 이상도 평균 이하도 하지 말라고. 딱 평균만 하라고. 내가 가진 평소의 노력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그렇게 해서 성과를 내면 그것조차 하지 말라고, 깎아내리고, 욕심 좀 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기 싫었다. 나는 내 앞에 주어진 퀘스트가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내가 가진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려 잘하고 싶었다. 그게 내 기질이었다. 못 하는 걸 어떻게든 노력해서 잘하고 싶은 적은 많이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그럭저럭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할 수 있는 건 '아주 잘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그냥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지게 잘 하고 싶었다.
평소보다 높은 시험 점수를 받아온 나에게 엄마가 공부도 너무 잘하지는 말라고 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이상함이었다. ‘부모님이라면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그리고 잘하고 싶어 하면 좋아해야 정상 아닌가?’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기분은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물질적 지원은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안 해주실 거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정서적 지지마저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제발, 막지만 말아주길, 하지 말라고 막지만 말아주시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치스러운 소원이었고 내 욕심이었다. 엄마는 내가 ‘무얼 하든’ 기어코 저지하고, 내가 ‘무얼 하고 싶어 하든’ 기어코 포기하라고 했고, 무얼 꿈꾸든 부정적인 가상의 미래를 읊어댔다.
무엇보다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사람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없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지 말아라'라고 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걸 억지로 하지 않는 것, 그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교 4학년 시절, 시나리오 창작은 전공을 해도 관련 분야로의 취업이 원래 어려운 분야라서 당연히 나 역시 취업을 못해 빌빌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관련 분야가 아닌, 그냥 일반 취업을 하려고 해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여서, 이럴 거면 좀 더 도전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들어 더더욱 글 쓰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젊으니 조금만 더 해보고 싶은 걸 도전해 보자는 마음과, 하고 싶은 일을 언제까지 도전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불안이 매일 매 순간 떠올랐다. 물론 계획한다고 해서 꼭 그 생각대로 돼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마지노선을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도 불안했다(네, MBTI 끝이 J입니다). 눈부시게 젊은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젊은 건 아니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없고, 취업을 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계속 꿈에 도전을 하는 것도 불안하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야 어떻든, 결국 취업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학자금 대출상환이라는 퀘스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하는 게,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쫓기듯이 한 취업이었으니 당연히 만족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근무 조건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아니, 좀 더 기다리고 찾아보면 그래도 그중에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고르고 자시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장녀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르바이트만 겨우 했던 반년 남짓의 취준 기간마저도 나에겐 가시 방석이었고, 마치 식충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 직장 동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노력해 온 꿈을 포기하는 고통이 상쇄되진 않았다. 물론 처음 해보는 밥벌이가 쉽지도 않았다. 그래서 퇴근 후엔 여러 곳에서 오는 복합적인 고통들을 중화시키기 위해 자주 술을 마셨다.
'그래, 다 이러고 살겠지. 모두들 하고 싶은 거 있지만 괜찮은 자식 노릇 하느라 하고 싶은 거 안 하고 살겠지. 나만 이러고 사는 거 아니겠지. 그럴 거야. 그러겠지. 나만 이런 게 아닐 거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할 만큼 해야만 그럭저럭 안정된 기분으로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부모님을 너무 원망하고 싶을 것 같았다. 왜 나를 이렇게 볶아치시냐고, 왜 나는 단 2-3년조 차도 꿈에 도전하면 안 되는 거냐고.
술을 많이 먹고 들어온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날따라 많이 마시긴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냥 아주 의식이 다 흐려지도록 진탕 마시고 싶은 날. 그날따라 일도 좀 힘들었던 날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한 번은 폭발하고 싶어서 그렇게 심하게 마셨던 것 같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어찌어찌 집까지는 두 발로 들어왔지만 현관문을 밟는 순간, 붙잡고 있던 의지력을 상실하고 네 발로 내 방으로 기어가다가 엄마에게 딱 걸렸다. 엄마는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이렇게 술을 처먹고 돌아다니냐고 잔소리를 했다.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고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냥 보내주시지. 만나는 남자는 있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블라블라블라.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엄마가 원해서, 엄마가 원하는 모습인 '평균적인 직장인'이 되려고, '사랑받는 딸'이 되려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지도 않고, 찍소리 안 하고 일하면서 살고 있는데, 제가 한 이 희생이, 지금 이 노력이 진짜 그렇게 별 볼 일이 없어요, 엄마?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앞으로도 그렇게나 많이 남았어요?'
왜 이렇게 많이 마셨냐고, 뭐가 힘드냐고 기가 막혀서라도 한 번쯤은 물어봐줄 법도 한데, 엄마는 한 번도 내 마음을 물어본 적이 없다는 걸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깨닫는다.
엄마로서 술 많이 먹고 들어온 자식에게 싫은 소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네 발로 기어들어온 자식에게는. 그런데 평소에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원하는 노력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좀 용기와 응원을 주는 좋은 소리를 좀 해주실 수 있지 않나 싶은 억울함이 들었다.
내가 정말 도전해보고 싶은 일을, 당신이 원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미뤄두고, 올라오지 못하게 꼭꼭 밟고 누르면서, 이력서를 수십 장을 쓰고, 행복하지도, 화목하지도 않은데 자기소개서에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서 책임감이 강한 장녀 어쩌고’하며 자기소개서를 가장한, 가족미화서이자 가족분위기 위조서를 써가며 이렇게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인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싶은 분노가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나는 남들이 한심해하든 말든 제발 한 2-3년 만이라도 그냥 내 앞가림할 용돈 정도만 벌면서 시나리오를 충분히 더 써서 제대로 완성하고 싶었다. 어차피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정도 노력은 해보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지원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신 눈에 들려고, 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행동으로는 포기했지만 마음으로는 포기가 잘 안 돼서 매일매일 기분이 얼마나 거지 같은데,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데.
내가 한 이 선택이, 그리고 이 모든 게 꼭 당신 때문만은 아니지만 당신의 마음에 들고 싶은 이유가 얼마나 큰데, 내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당신에게 이렇게 혼이 나야 하는 거면,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잔뜩 들이부은 탓에 내 혈관에 높은 함량으로 흐르고 있던 알코올이, 그런 내 안의 목소리를 떠밀었다. 나는 아까 전까지 기어가던 사람답지 않게 (물론 내가 기억을 왜곡하거나 나 자신을 미화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갑자기 똑바로 앉아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내가 얼마나 엄마 때문에 포기한 게 많은데, 잘한 게 없어? 잘못한 건 또 뭔데? 고등학교 때든 중학교 때든 사고를 친 적이 있어, 엄마 속 썪인 적이 있어? 하다 못해 엄마가 학생이 연애하는 거 아니라고 해서 남자애들이 근처만 와도 쫓아냈어(사실은 딱히 누굴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거지만). 고등학교 땐 대학만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그 이후엔 글 쓰고 싶으면 쓰라며. 그러면서 지원은 죽어도 안 해줘서, 그래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취업했는데, 이제 또 결혼? 나 하고 싶은 건 언제 할 수 있는데? 결혼하면 애 낳으란 소린 안 할 거야?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도대체 언제 제대로 할 수 있는 건데? 내가 하고 싶은 거 안 하고, 엄마가 원하는 거 하고 사는데, 내가 잘하고 있는 게 없어? 나한테 좋은 소리 한번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딸 고생한다 내 편 들어주기만 해도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아니면 해주기가 싫어? 아니면 내가 싫어?”
술 먹은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이 나는 말하는 도중에 울고 말았고, 지금 이러는 게 유치하고 애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내가 오랫동안 하고 있던 생각을 다 말했다. 술을 많이 들이부은 보람이 있었다.
“엄마가 계속 나 하고 싶은 거 막아서, 그래서 결국에는 이렇게 포기하게 만들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 살게 하면서 지금 이렇게 술 좀 많이 먹었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죽을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굴면 내가 엄마 용서할 것 같아? 이제 겨우 27살인데도 억울해 죽을 것 같은데, 계속 이런 식으로 살게 하면서 내 원망 다 감당하시겠어요? 나, 요즘 계속 생각해. 내 나이 마흔 되고, 쉰 돼서 엄마 늙고 힘 없어지면, 허구한 날 매일매일 원망할 거라고. 엄마가 듣든 말든 옆에 붙어서 맨날, 평생, 원망할 거야. 알고는 있으세요. 내가 엄마를 얼마나 원망하는지. 나 진짜 죽을 때까지 이 마음 변치 않고 원망할 자신 있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요. 그리고 또, 이 원망 평생 다 감당할 자신 있으면 계속 나한테 이런 식으로 해요, 나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안 무섭긴. 말만 저렇게 했지 내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는 딸이 될까 봐 매 순간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살았는데. 그냥 술기운에 말이라도 저렇게 토해내야 살 것 같았을 뿐.
엄마 옆에 붙어서 평생 원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몇 년 전, 끊임없이 금전적인 부탁을 하는 가족들과 절연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 저 난리를 치고 지냈으면서 가끔 엄마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그렇다고 다시 연락하고 살고 싶다는 건 아니고).
엄마가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번번이 저지하면서 했던, 가장 강력한 내 발작버튼은 바로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였다. 나 역시 그 말을 내재화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억누르려고 할 때, 스스로에게 저렇게 말하곤 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 거야.'
하지만 저 말에 내가 완전히 잠식되었던 건 아니었었나 보다. 한 번은 저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라는 엄마의 말이 그날따라 내 안의 어딘가를 심하게 찔렸고 나도 모르게, ‘그럼 남들이 다 불행하게 살면, 나도 똑같이 불행하게 살아야 돼? 남들과 다르게 행복하게 살면, 불법이야? 제네바 협약에 나와있어? 잡혀가?’라고 말도 안 되는 악다구니를 부렸다. 엄마는 미쳐서 반쯤 돌아버린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 덤덤히 말했다.
"니가 뭔데. 니가 뭐라고. 남들과 다르고 살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데."
아. 어머니,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제가 항상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서, 당신에게도 나의 행복이 꽤 중요한 줄 알았거든요. 당신은, 정말이지 나에 대해, 나의 행복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군요. 몰랐어요. 저는 당신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네요.
예전엔 엄마가 그렇게 미운데도 안쓰러웠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는데 왜 안쓰러운지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포인트 때문에 내가 그녀를 안쓰러워하는지 안다(그래도 연락하고 살고 싶진 않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이것저것 배우고 아는 걸 좋아하는 걸 알게 된 외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면서, 내 머리를 찬찬이 다정하게 쓰다듬으면서 자주 해주셨던 말이 있다. ‘그러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 ‘여자가 공부 좋아하면, 어떤 시집에서,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노. 여자면 시집가서 애 낳고 살림해야지.' '공부 많이 하지 마라, 대가리에 헛바람 든다.’ 어린 나에게 했던 외할머니의 말들. 어렸던 엄마,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엄마에게도 뇌가 절여지도록 했을 그 말씀.
그래서 엄마가 나한테 그랬었구나.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과정을 이해하려고 막 노력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어느 날 문득 쉬는 날 창밖을 보다가 그렇다는 걸 알았다. 엄마가 나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하고 싶은 걸 포기하게 만들려고 했던 이유가, 엄마를 돌보고 기르던 사람이 오랜 시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걸.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 여자애가 뭐 한다고 공부 많이 하려고 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어디에 쓰냐고 했던 그 말. 외할머니가 나에게 했던 그 말은, 그나마 나에게는 나름 손녀라고 좀 너그럽고 부드럽게 말하셨던 것일 테지만, 엄마가 들었던 말투는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차갑고 냉정한 말투였을 것이다. 원래 리스닝이 좀 그렇다. 많이 들으면, 어느 순간 똑같은 뉘앙스로 말하게 된다.
착한 딸이었던 엄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외할머니가 원하는, 하지만 자신은 원하지 않는 남자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당신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가 시킨 시집살이썰은, 여느 시집살이썰이 그러하듯이 상상하지도 못할 포인트에서 혈압을 올릴 수 있으니 말도 꺼내지 않겠다. 엄마는 가랑비처럼 쏟아지는 미세한 불행 속에서, 어느 순간 이 고통이 인생이라고, 이게 정답이라고, 원하지 않지만 부모님이 시키는 결혼, 양가 부모님이 원하는 출산, 양육,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하기 싫지만, 남들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해야만 이 삶을 견딜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거나, 어디 가서 몰래 죽는 거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그리고 한때는 정말 다들 그런 식으로 이 꽉 깨물고 살았으니까.
다들 이렇게 산다고, 욕심부리지 말라고, 자신에게 했던 말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되뇌었을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동안 이유를 몰랐으면서도 엄마가 안쓰러웠던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꿈 많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을 엄마가 무언가를 꿈꾸고 노력하고 상상할 때마다 가차 없이 가해졌을 제재와 미세한 폭력이 나는 이제 어느 정도 그려진다. 그래서 그게 정답이라고 믿고 나에게 매번 말했던 것이다. 당신처럼 언젠가 꺾여질까 봐,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를 꺾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그래서 어쩌면 나는 "엄마, 나 낳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는 밈은, 엄마가 겪었던 고통과 우리가 느꼈던 죄책감을 우리 대에서 끊고 싶어서, 그리하여 우리가 임신하지 않고, 그래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한 적 없는 미래의 자식, 그리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존재한 적 없는) 딸, 그리고 아들. 미안한데 너희 안 낳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