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Jan 12. 2024

효녀와 종년 사이의 균형감

그 균형점을 찾을 수가 없다

가족과 연락을 끊은 지 4년째가 되어 간다.


부모님과 인연을 끊기로 한 가장 큰 계기는 5년 전, 엄마가 남동생이 진 카드빚을 나에게 대신 갚으라고 한 일이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금액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내가 공부시켜 달라고 학원 좀 보내달라고 하면 여자애가 판검사 될 것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공부 욕심이 많냐고 번번이 공부 부탁을 거절했지만, 동생이 뭐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동안 그렇게 돈 없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또 어찌어찌 동생이 하고 싶은 건 또 기어코 들어주셨다.


그걸 내가 평생, 바로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며 살아왔는데, 이젠 내가 그 녀석이 싸지른 똥까지 치우며 살라고? 사실 내가 비뚤어져서 사고나 치고 다니고 내 동생이 내 똥 치우며 사는 게 인과관계상 맞지 않나 싶은데 원래 세상이란 게 인과관계 딱딱 맞아떨어지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여하튼 사랑하는 동생이라면 이 꽉 깨물고 갚아주지 못할 금액도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동생을 사랑하질 않는다. 내가 겪은 피해가 우리나라에 있는 산의 수만큼 많은데 어떻게 내가 널 사랑하겠니. 생각해 보니 대략 6살 때까진 사랑했던 것 같네. 그래도 그땐 우리가 받는 처우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와중에 부탁하는 모양새도 아니었다. ‘니가 얘 빚 갚아!‘하며 윽박지르듯 엄마는 남동생 빚을 나에게 떠안으라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 돈 내가 쓴 줄.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러워야 하는 게 돈 빌려달라는 부탁 아닌가?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달라는 말을 아무리 엄마라지만 이런 식으로 한다고?


내가 딸이라서, 지금 이 순간이 무슨 전국노래자랑도 아닌데 전국에서 돌림노래로 부르는, 그놈의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그 망할 장녀라서,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돈 달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따위로 소리를 지르는 건가? 장녀로 태어난 게 무슨 죄인가? 내가 ‘나 태어날래요!’ 하고 내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두 분이 한 부부 관계(가족계획이라 칩시다)때문에 태어난 것인데, 상식적으로 내가 첫딸로 태어난 것에 내 책임인 부분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나?




그동안 살짝살짝 무례한 부탁도 잘 들어드렸던 게, 시키는 걸 군소리 없이 잘해드렸던 게, 결코 잘한 짓이

아니었다는 걸 이렇게 뒤늦게 한 번에, 아주 강렬하게 깨달았다.


나를 부담 없이 부려먹으시라고 당신들께 잘해드린 게 아니었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잘해드리는 게 행복했다. 부모님을 웃게 해 드리는 게 내 행복이었다. 그들을 걱정시킬 일은 먼지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이나 행동이 사회적으로 칭송하는 ‘효녀 프레임’에 갇힌 것이라 해도, 그런 내가, 효도하는 내가 좋았고 행복했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성취감 같은 게 분명히 있었다. 부모님이 선 넘기 전까지.


아니, 선은 수시로 넘긴 했지만 그래도 ’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버텼다. 짜증 나는 순간도 분명 여러 번 존재했지만 버텼다. 나는 뼛속 깊이 효녀였고, 무엇보다 계속 효녀이고 싶었다.


사실 우리 가족이 한 일을 ‘친구’인 누군가가 했다면 장문의 카톡과 함께 차단을 박았을 것이고 ‘연인’이 했으면 길게 말하지도 않고 ‘돌 빨았냐’를 시전 하며 헤어졌을 텐데 ‘가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버텼다. 하지만 이젠 버틸 인내심이 완전히 소진됐다.


효녀이고 싶던 마음이, 봄철 눈 녹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돈문제뿐만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가족들의 그 태도,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말도 안 되는 요구의 반복됨이 지겨웠다. 원래도 지겨웠지만 ‘효녀 노릇 욕구’가 사라지자 이제 참을 수 없이 지겨웠다. 효녀이고 싶고 잘해드리고 싶었던 강렬한 마음만큼, 그에 대한 배신감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우리 집 종년인가? 아니 ATM인가? 아니 둘 다인가.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부모님께 효도하며 평범하게, 남들 하는 평범한 고민을 하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바라는 건 무조건적인 희생, 가족 중에 누군가(당신들의 아들)이 사고를 치면 내가 다 수습하길 바라는, 무슨 종년에게나 바랄 법한 순종적이고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종이라 치면 최소한 대감집에서 일하면서 적은 임금이라도 받는 포지션이 아닌가. 나에겐 그런 작은 베네핏도 없었다.


내가 죽도록 방법을 찾으려 애쓰면 몇 십 년쯤 지난 어느 날, 내가 원하는 효녀의 모습과 부모님이 원하는 종년 노릇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감을 찾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들이 그 균형감을 찾으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걸 더는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비슷한 맥락이지만 새로운,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과 이어지는 행동들, 또 그전에 있었으나 참았던 일들로 인해 오랜 기간 누적되어 있던 내 안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정확히는 바닥나 버린 인내심의 게이지가 다시 올라오지 않아서 연락할 에너지가 생기지가 않았다.


내 안의 분노는 뜨거운 분노가 아니라 아주 차갑게 식어버린 분노여서 부모님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아니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내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그냥 오랫동안 나를 실망시킨 친구에게 하듯이 서서히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사실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단지 이 일뿐만이 아니라 그전부터 누적된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문제는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적당한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적당함, 적절함, 균형’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적절한, 균형감 있는 사람이고 싶다. 훌륭해지고 싶진 않지만 평균 이하이고 싶지도 않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이해하건 말건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횡설수설하지 않고 적절하게

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낼 적당한 기회가 아마 온다면 나는 그동안 묵혀둔 감정이 썰물처럼 밀려와 반드시 횡설수설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솔직히 그럴 기회가 오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내가 겪은 서운한 일들은 가족들에겐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 일들일 텐데 그걸 기억 못 하는 가족들에게 그걸 왜 기억 못 하느냐며 따지느라 말을 끊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찢었다’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뛰어난 웅변가처럼 청산유수 같은, 라임도 딱딱 맞는 분노의 랩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내 안의 빅데이터가 말해주었다.


‘가족에 관한 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뭐, 나도 알고 있는 정보지만, 빅데이터가 한번 더 그걸 확인시켜 주었다. 하이빅스비, 나도 알고 있어.


엄마가 가끔 연락이 온다. 가족들도 내가 이러는 이유, 당신들을 멀리 하는 이유, 그 분노를 어렴풋이 짐작은 하겠지만 가족들은 ‘원래 우리 가족의 모습’을 되찾으려 계속 나에게 손을 뻗는다.


내가 자기착취해 가며 희생하며 입 닥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연기했던 그 딸을 되찾고 싶으시겠지. 그렇다고 나에게 사과를 한다거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시진 않았다. 그냥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자는 말만 되풀이할 뿐.


엄마, 아빠. 두 분이 말하는 ‘예전’ 속의 나는 지독히 불행했어요. 게다가 안 그런 척하느라 두 배로 불행했어요.


그렇게 나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내가 원하는 어떤 균형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전 04화 멀티가 안 되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