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Dec 21. 2023

멀티가 안 되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나는 원래 멀티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회사에서 업무를 할 때도, 집에서 일을 할 때도 A 하다가 B로 모드 점핑이 잘 되는 인간이었다. 


회사에서 이거 시키다 저거 시키면, 가끔 시킨 분들이 자신이 뭘 시켰는지 까먹곤 하셨는데 나는 그런 걸 잊지 않고 챙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는 게(위에서 시키시는 게) 짜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뭔가 일을 엄청 열심히 한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다만 이게 집중력이 없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업무를 펼쳐놓고 하면 곧잘 하고 묘한 성취감과 일을 해내고 난 후의 쾌감이 있는데, 오히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고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나른해지고, 하기 귀찮다는 느낌, 시간이 안 간다는 생각 등이 줄곧 들곤 했다.  


예전엔 그게 내가 집중력이 없어서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어쩌면 그게 순간 집중력이 좋아서 이 일에서 저 일로 모드 전환이 빠르게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건 일에 대한 어떤 종류의 도파민 중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나 요즘의 내 루틴을 생각하면 더욱더 예전의 내가 멀티에 능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 말은 지금은 멀티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겨우 1년 전만 해도 나는 퇴근하고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아 30분-1시간씩 글을 쓰곤 했었다.


'엄청난 창작' 같은 건 아니고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각각 1시간 가까이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시간에 핸드폰 메모장에 써둔 시나리오의 플롯을 발전시킨다거나 서사에 살을 붙인다거나 하는 작업들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걸 한글 파일에 매끄럽게 이어 붙여서 분량을 만드는 그런 작업들을 했었더랬다. 


그런 작업의 시간들은 '오늘 집에 가면 반드시 해야지.' 하는 의무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5일 중에 3-4일은 했던 것 같다. 내가 특별히 부지런하다는 감각도 없었다.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했고, 솔직히 하기 싫은 날도 많았고, 나 좋자고 하는 일이어서 했다. 가끔 귀찮다고 주변에 징징거린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뭐가 됐든 하긴 했다. 


몸이 아파도 했고, 졸려도 했고, 술 먹고 들어온 날에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루에 다 하곤 했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버젼의 나라는 생각은 아니다.  





나는 최근에 일해본 적 없던 분야로 이직을 했다. 


그 일의 업무 특성상 일주일에 2일은 12시간 가까이 일을 하고 대신 평일 하루를 대체휴일처럼 쉬는 구조인데 어떻게 보면 주중에 하루를 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혜택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쉬는 날에 내가 하는 게 별로 없었다. 


그저 좀 더 느긋하게 집안일을 하고, 밀린 은행 업무를 처리하는 정도의 일만 할 뿐, '온전한 그 하루'를 생산적인 일로 보내지는 않았다. 예전의 나는 롤러코스터처럼 뭔가 휘몰아치듯이 하는 것을 '잘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휘몰아치듯 뭔가를 하는 것으로 내 시간을 채워야 제대로 사는 것 같다고 느끼는 편이었다. 그래야 뭔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해야 인간 관계도 최선을 다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티나지 않게 평온하게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은 더욱 잘 쉬려고 한다. 


예전에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있다면 생산적인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생산적인 일'이란 물론 글을 쓰는 것이다. 


주 5일을 매일 출근하며 일하던 때, 지금처럼 평일에 하루를 쉬게 되면 글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쓰게 될 줄 알았다. 막상 그렇게 하지 않는 나를 보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자투리 시간에도 글을 틈틈히 썼는데 요즘은 하루라는 통시간이 있는데 왜 안 쓰는 거지.'


그런데 그게 딱히 불안하거나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예전처럼 퇴근하고 돌아와 손만 씻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는 일은 이제 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게을러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멀티가 되지 않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누군가는 이걸 퇴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 삶의 안정감을 주는 방향으로 내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진화라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