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를 보다가
*스포있음
언젠가부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영화와 드라마를 장악하고 있다. 특별한 신체적 능력- <무빙>처럼 날아다닌다거나, <힘센 여자 강남순>처럼 타인과 비교 불가능한 그런 능력을 가진 주인공 말이다.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주인공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인간, <나비효과> 의 에반이었다. 그동안 내가 본 초능력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에 어려움이나 고통은 있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타인을(심한 경우 사회를) 위험에서 구하고 자신도 어느 정도 행복한 삶을 갖게 되는 그런 결말을 맞이하는 인물들이었다.
<나비효과> 속 에반은 초능력을 갖고도 전혀 행복해지거나 타인을 구할 수 없었다. 물론 세상도 구할 수 없었고.
어린 시절에 옆집 남자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경험한 에반은 어찌저찌 평범한 대학생이 된다. 대학생이 된 후 우연히 일기장을 읽다가 자신이 쓴 기록(일기, 녹음, 영상)을 되새기면, 그 기록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에반은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준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 과거로 돌아가 그 불행들을 바꿔보기로 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고 그 상처 때문에 목숨을 끊은 첫사랑 에이미.
에이미의 오빠 토미의 폭력으로 인한 어떤 일 때문에 정신병을 앓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된 친구 레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문득문득 떠올렸던 그들의 불행을 떠올리고 그들을 구해주기로 결심하고 과거로 돌아가 그때와 조금씩 다르게 행동하는 에반.
그들을 구하고 싶어 어린 시절의 자신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구하고, 또한 어린 아이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고.
내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에반이 에이미와 레니를 모두 구하고 폭력적이었던 에이미의 오빠 토미까지 교화시킨 이야기였다.
이야기 초반, 에이미의 오빠는 아버지의 폭력과 성적 학대로 인해 자신 역시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똑같이 난폭한 성격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피해의식으로 원래 인간 쓰레기였던 토미.
그랬던 토미가 에반이 과거로 돌아가서 한 어떤 선택으로 인해 선하디 선한 청년으로 완전히 뒤바뀐다. 마음 속 깊이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차 누구 하나 죽일 것 같던 토미가 갑자기 신의 뜻을 탐구하는 신앙심 깊은 청년이 된 계기는, 에반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은 에반이 전혀 각오한 적 없는 희생이었다.
에반은 원치 않던 자신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했고 그 덕분에 친구들은 훨씬 행복한 삶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에반은 그 대가로 신체의 대부분, 그러니까 팔과 다리를 모두 잃는다. 그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다. 자신의 초능력을 알기 전 평범한 대학생일 때 누리던 것들, 이전에 아무렇지 않게 누리던 것들을, 이제 어느 것도 제대로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모두를 구한 댓가로.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좀 더 나아진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분명 예전보다 더 나아진 세상인 것은 맞다. 단, 에반의 일상이 지옥이 된 것만 빼고.
우리는 가끔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길 원하지만, 그 댓가가 나의 처절한 희생일 때 그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 팔다리를 바치고 세상이 나아진다면 그게 과연 최선일까. 대부분 그냥 지옥 같은 세상을 팔다리 있는 채 살고 싶을 것이다.
에반도 그랬을 것이다.
에반만 빼고 모두 행복하다. 에반의 친구들과 에이미 모두 자신들이 갖게 된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이 에반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모두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를 하지만 그걸로 에반의 일상이 견딜 만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에반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또 다시 미래는 바뀌지만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다시 과거로. 다시 과거로. 에반은 계속 과거를 되돌린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서. 자신의 뜻과 달리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꼬이고 그 어떤 노력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꺠달은 에반은 마지막으로 돌아간 과거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인연을 끝내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랑하고 보호해주고 싶었던 첫사랑 에이미에게 씻지 못할 상처의 말을 하고, 레니를 더나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추억을 쌓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 버리는 과거를 만들어버린다.
그 잔인한 선택으로, 에반은 에반의 인생을, 에이미는 에이미의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서로를 애틋하게 하던 마음을 지불한 댓가로, 서로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인이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선택,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순간이 그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무력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후회했던 그 순간이 어쩌면 지금의 평온을 이루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초능력이 있다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과거보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길, 조금 덜 후회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현재의 위치에서 조금 더 숙고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