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양보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세종대왕 위인전을 읽었을 때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추느라 그랬겠지만 양녕대군이 자기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자책했다. 양녕의 양보심을 책으로 접했을 때 왕가는 역시 다르구나, 하며 허구헌날 동생이 가진 것을 샘내는 내 그릇을 잠깐 부끄러워했다. 위인전을 읽고 나서 살짝 감동한 나머지 한 몇달 양보하며 살아보기도 했는데 그러고 나자, 나는 어린 나이에도 사는 게 별로 행복하지 않고, 동생 또한 내 양보게 크게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어서 양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키워드 검색에 양녕, 어리, 충녕 등을 검색하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왕자 시절의 세종을 만날 수 있다.
시간절약을 위해 태종실록, 태종18년5월11일자를 발췌한다.
충녕대군이(...) 개성으로 돌아가다가 세자를 마산역 앞 길바닥에서 만났는데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하니, 충녕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한 부분이 있다. 양녕의 행실을 문제삼아 신하들이 폐위를 건의하자, 궁정 분위기를 알게 된 양녕이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충녕을 길에서 마주치자 니가 왕위를 물려받고자 어리의 고자질했다고 따지자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된 데는 2년 전 사건이 있다. 어리 스캔들 2년 전, 양녕이 매형 이백강의 첩 칠점생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충녕이 ‘친척 중에서 서로 이같이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라고 여러번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충녕이 여러번 말했다는 것은, 양녕이 한번 말해서 안 들었다는 것이고, 매형 첩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정신머리로 보아서는 술도 진탕 먹었을 거라는 짐작이 간다.
양녕도 왕세자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 '충녕은 약해 왕의 그릇이 못 됩니다' 라고 태종대왕에게 말하는 장면도 있다. 서로 서로 견제한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녕이 왕세자에서 폐세자가 될 경우 가장 큰 이득을 얻게 되는 사람이 충녕대군임을 생각해봤을 때, 양녕이 한 의심은 합리적의심이라는 것이다.
가끔 태종대왕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타이밍에 고자질할까 생각하는 아들인, 10대인 충녕을 떠올린다. 고자질이란 게 잘못하다가는,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하는 사람이 더 야단맞고 밉보일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몹시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 밑바닥엔 정말이지 좋은 왕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잘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매형의 첩이라고 보일 것이다. 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에 딸이 있었다. 그것도 4명이나. 그러니까 아들이 4명, 딸이 4명이었다. 아들이 3명이라고 알려져 있는 건 마지막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동생인 성녕대군(1405~1418)이 14살밖에 안 되었을 때 죽었기 때문이다. 그게 1418년인데, 세종이 즉위한 해라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 한 수많은 업적보다 그 이전, 왕이 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형을 압도할 유치한 고자질을 했던 왕자인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좀더 안도가 된다. 세종대왕도 뭔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