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빌런이 살고 있습니다

전국 도처의 직장에서 암약 중인 빌런감별과 퇴치를 목표로 렛츠고!

by 국물의 여왕

가스냄새(?) 자욱하던 첫 회사를 탈출한 이후 여러 회사를 경험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전무후무한 가스라이팅의 대마왕이 살고 있던 그 회사의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그 후 아무리 까칠한 상사를 만나도 딱히 힘든 줄을 모르는, 맷집 만렙의 회사원으로 성장했다 자부하는 필자다.

그래도 롤러코스터 같던 스무몇 해의 회사생활 중 진정한 빌런으로 기억할만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무던한 성격도 아니었건만 인복이 있었다. 열정만 넘치던 천방지축에게 격려와 기대를 아까지 않는 상사가 있었고, 힘들 때면 SOS를 청할 동료와 내 모자란 점도 기꺼이 보완해 주는 팀원들이 있었다.


그러니 어리버리 에너지만 넘치던 신입이 산전수전공중전도 가뿐히 소화하는 베테랑으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세월의 힘은 물론, 고마운 이들의 지원과 격려가 컸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절대로 꺾이지 않을 나만의 '일의 원칙'을 만들고 지켜오게 되기까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몇 안 되는 ‘진정한 빌런들’의 영향이 더 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었다는데, 나는 빌런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 말의 의미를 내 마음대로 해석해 봤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 사람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미워하다 닮는다고, 내가 당한 일을 며느리에게 시전하는 못된 시어머니 꼴이 되진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늘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남을 탓하기 전에 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실 나부터 돌아본답시고 빌런의 무차별한 공격에도 반격할 시점을 놓치는 게 다반사이긴 했지만, 어떤 현인이 이르길 ‘바보와 맞서 이기는 가장 현명한 전략은 애초에 싸우지 않는 것’이라 했다. 나아가 내가 원하는 상사를 골라 가질 수 없다면 ‘내가 좋은 상사가 되어서 나의 후배와 부서원들에게 베풂으로서 한풀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 때문에 힘든 부하직원을 만들지는 말아야지라는 소극적인 다짐이었는데, 사실 내가 그 덕을 제일 많이 보았다.


좋은 팀을 꾸려 나 혼자로선 불가능했을 다수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래도 어언 30년이 되어가는 직장생활 중 내가 들었던 가장 멋진 칭찬은 가장 어려운 시절을 한 팀에서 부대꼈던 팀원들이 해준 ‘꼭 다시 같이 일하고 싶은 상사’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 것인지, 누군가가 잘 해준 기억은 잊기 쉬워도 나를 괴롭힌 기억은 도저히 잊기 어렵다. 결국 끝끝내 잊지 못해 타산지석으로 삼았던 빌런의 기억은 그 어떤 은인의 기억보다 강하게 남아 ‘일하는 사람’인 나의 마지노선을 지키게 해 주었다.


하지만 상식적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행동으로 일터를 지옥으로 만드는 빌런 같은 상사, 동료, 심지어 부하직원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회사를 끌고 나갈 좋은 인재가 되었을 성실한 직원들이 어이없는 빌런들에게 시달리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도와줄 수도 답을 줄 수도 없는 나의 한계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때는 그들을 붙잡을 힘도 지혜도 없었지만,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으로 어찌 됐든 거진 30년을 다수의 회사를 거치며 살아남은 지금이라면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힘만으로는 무리겠지만, 내 곁에는 앞서도 말했듯 나보다 훌륭한 동료들과 상사들이 많았다. 합하면 수백 년 치에 이를 이를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빈다면, 분명 의미 있는 가이드가 되어주리라.


그래서 빌런과의 기억을 쓸어 담은 체험기를 시작한다. 소개될 에피소드들은 어리바리 좌충우돌 시절을 넘어 몸 안에 쌓인 사리탑을 일반 분양해도 남을 만큼 숙성된 직업인이 되기까지, 참으로 다채로운 빌런들의 은혜(?)를 입은 바 있는 나 자신의 경험과 선배, 후배, 동료들의 쓰디쓴 고생담에 기초한 바이다. 다만, 이제는 뉘우치고 돌아가 거울 앞에 섰을지도 모를 빌런들의 프라이버시와 그래도 내가 참을 걸 괜히 이야기했나 고민할 여리고 소심한 제보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모두 가명을 사용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빌런들 중에는 나의 모습도 들어있음을 미리 고백해야겠다.


가능하다면, 이 글들을 엮어 오늘도 일터의 빌런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직장인들의 애환을 조명하고, 도처에 암약 중인 빌런을 감별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부적 같은 책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까 책 한 권으로 위로도 해야 하고 빌런도 감별해야 되고 마귀야 물렀거라 퇴마도 해야 하니 이런 야심 찬 집필의도가 또 있을까. 하지만 뭐 이효리 님 말씀대로, 가능한 것만 꿈꾸란 법은 없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