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정말 미친 줄 알았어요

팀원을 정신과로 내모는 마이크로매니지형 빌런

by 국물의 여왕



20여 년 전의 일이다. 굳이 시기를 밝히는 이유는 당시만 해도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도, 회사가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노동법도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허약했던 때라는 점을 감안했으면 해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부당한 대접을 받고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이나 체계가 없었던 탓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미영씨는 나의 베프 진희와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다. 미영씨가 상근부회장, 상무, 팀장들 및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포함 총 6명이 전직원인 협회의 비서로 일할 때다. 생긴 지 당시 2년이 채 안 된 협회는 아직 규모가 작지만, 마진율과 잠재력 측면에서 업종을 통틀어 Top5에 드는 첨단산업분야의 글로벌 기업들이 출자해 만든 신설 단체였다. 덕분에 미영씨와 동시에 입사한 두 명의 팀장들도 나름 각자의 분야에서 평판과 역량을 갖춘 경력직들로, 상당한 연봉을 받고 막 이적한 참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임자들이 미영씨와 두 팀장들의 입사 전에 그만둬 인수인계를 받을 수 없었고, 오로지 남겨둔 서류만으로 업무 흐름을 파악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 사람은 전문성이 필요한 실무에는 딱히 지식이 없는 상무와 부회장의 두루뭉술한 지시 하에 대부분 각자의 역량으로 알아서 본인의 업무분야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입사 후 3개월에 접어들기도 전에 세 사람은 책 한 권을 함께 사서 나눠보며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상사 밑에서 똑똑한 부하직원들이 일할 때”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협회의 업무 자체는 경력 있는 세 사람이 진행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실무에는 지식이 없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부지런한 상무의 종잡을 수 없는 업무 지시와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는 기분 탓에 도무지 종료되는 업무가 없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미영씨는 상무로부터 소속 기업들의 사장들이 모두 모이는 총회의 어젠더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총회의 목적이나 장소, 참석자에 대한 정보를 상무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상무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부회장 또한 도와줄 생각이 없다. 결국 미영씨는 작년 이 맘 때의 총회 관련 서류를 찾아보고 두 팀장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초안을 만들어 상무에게 들고 갔다.


“미영씨, 이게 뭐야?”


“다음 달 총회 어젠더 초안입니다. 일단 초안인만큼 피드백을 주시는대로 바로 수정을…”


“아니, 이게 뭐냐고!” 갑자기 상무가 소리를 빽 지른다.


“네?”


“폰트 사이즈가 이게 뭐냐고. 그리고 줄 간격이 왜 이렇게 좁아?”


“(헉) 아 네, 이 폰트는 과거 총회 어젠더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그게 맞다고 누가 그랬어?”


“예? 아, 일단 다른 지시없이 먼저 만들어 보라 하셔서…”


“내가 언제 과거 어젠더를 참조하라고 그랬지? 그게 맘에 안 들어서 시켰다는 생각은 못 하나?”


“그럼 지금 지시를 해주시면 폰트와 사이즈는 바로 수정할 수 있으니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아니, 그건 상식이잖아. 기본적인 포맷도 못 맞추면서 무슨 어젠더를 써? 됐으니까 다시 해.”


다시 해오라면서 역시나 명확한 지시는 해주지 않는다. 너무도 신경질적인 상무의 태도에 도저히 더 물어볼 엄두가 안 나, 확인하고자 했던 회의의 어젠더 내용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할 수 없이 상무가 직접 작성했다는 회의록을 살펴보니 이건 또 뭔가. 미영씨가 쓴 어젠더와 같은 견고딕체에 같은 사이즈다. 유일한 차이는 줄 간격이 1.5배가 아닌 2배라는 것뿐. 바로 수정해 가져가니 이번에는 줄 간격이 왜 이리 넓냐며 트집이다. 할 수 없이 과거 상무님이 작성한 회의록을 참조했다 하니 회의록과 어젠더가 같냐며 눈을 치뜬다.


이런 식의 밑도 끝도 없는 트집잡기가 계속되니 보고를 한 번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팀장들의 경우는 오히려 더했다. 각자 분야에서 이미 역량을 입증 받은 사람들이건만 그 놈의 폰트 타령과 그래프의 색깔 지정과 또 내용에 상관없는 온갖 지적질에 시달리느라 상무와의 미팅이라면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상무의 기분에 따라 협회의 보고서와 발표자료들은 매번 전체 포맷과 글자체와 사이즈가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팀장들에게 더 큰 문제는 매달 수십명에 달하는 회원사의 전문가들이 참가해 진행한 각 위원회별 월간회의의 결정사안들을 상무의 입맛대로 바꾸라며 압력을 주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회의에서는 본인보다 전문가들인 각 회사의 대표자들이 논의해 결정한 사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던 상무가, 회의록에서 이를 은근 슬쩍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하라는 지시다. 하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조작을 하자니 하늘로 손바닥을 가리는 형편이라 팀장들은 진퇴양난이었다.


어쨌거나 직속 상관인 상무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간 당장 난리가 날 테니 울며 겨자먹기로 내용을 수정해 내보낸다. 그러면 회의에 참석했던 대표자들이 회의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왜 다르냐며 항의가 빗발친다. 조작을 지시한 것은 상무지만 회의록의 발신자인 팀장들이 욕을 먹는 것이다. 막상 지시를 내린 상무는 생각보다 회의 참석자들의 반발이 거세지니, 쏟아지는 문의에도 니들이 쓴 메일이니 니들이 답변하라며 팀장들에게 책임을 미룬다. 애초에 회의록을 수정한 내용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아는 팀장들은 제대로 답변을 할 수도 없다.


그렇게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 직원들이 무능하여 협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상무가 볼 멘 소리를 하고, 부회장은 직원들을 불러다 상무를 제대로 보필하라며 일장연설을 한다. 이런 상황이 삼개월 내내 반복되자 미영씨를 비롯한 팀장들은 큰 맘을 먹고 옮긴 회사건만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영씨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과거 진행된 프로젝트의 비용 처리 여부를 확인하려다 전임자에게 간단한 문자를 남겼는데,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문자와 전화상으로 해당 이슈는 간단하게 답변을 받은 참이라 굳이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무의 행태와 협회의 업무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상무의 행태에도 싸고 돌기만 하는 부회장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미영씨는 이 참에 전임 비서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그녀를 점심에 초대했다. 마찬가지로 고군분투하던 팀장들 또한 좋은 기회라며 전임 비서와의 점심 약속을 반겼다.


조금 수척해 보이지만 얌전하고 유순한 인상의 전임 비서는 협회가 첫 직장이었다고 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돼 함께 합류했던 팀장과 운전기사가 그만두는 바람에 상무와 부회장과 세 명만 있던 협회에서 1년 넘게 근무했다고 한다. 업무와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드디어 상무와 부회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인데 전임 비서가 먼저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요… 두 분 행동 많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네, 상무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업무 지적을 계속 하고, 부회장님은 상무님의 그런 행동 때문에 일이 계속 꼬여서 회원사들은 물론 정부 부처에서까지 항의를 받는 데도 싸고 돌기만 해서…”


“두 사람 한 번 회의실에 들어가면 몇 시간씩 회의하는 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않아요?”


어? 드디어!!!! 그간 심증은 있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이 전임 비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둘이…”


“네, 짐작하시는 거 맞아요.”


이런, 이러니 상무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부회장이 무한 쉴드를 칠수 밖에 없는 거였다. 게다가 전임 비서는 우리와 달리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바람에, 상무에게 갖은 고초를 당하다 심한 우울증이 와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다가 온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영씨와 두 팀장은 경력도 있고 셋이 함께 있는 터라 상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나마 한정되어 있었지만, 하필 첫 회사여서 사회경험이 거의 없었던 전임비서는 홀로 상무의 온갖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최악은 전임비서가 어느날 상무가 부회장의 방에 들어간 사실을 모르고 문을 열었다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목격한 날부터 시작됐다. 놀란 가슴을 누르며 바로 뒤돌아 나온 그녀에게 상무가 쫓아 나와 왜 회의실에 들어온 거냐, 무슨 의도로 들어온거냐를 다그치며 윽박지르더니, 갑자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뭐 본 거 있어요?’라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더란다. 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되묻는 그녀의 태도에 질린 전임비서는 “아니요, 죄송합니다…”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상무는 전임비서가 눈으로 목격한 사실마저 지워버리려는 듯 모든 것을 꼬투리 잡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이후 수개월 간 상무의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다 지친 그녀는 나중에는 자신이 본 게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 되었고 일상적으로 하던 업무마저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게 되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 분을 만나서 제가 본 것이, 제가 느꼈던 억울한 심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위안이 돼요…”


결국 그간의 전말을 털어놓자마자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위로하며 세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한 가지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자!!!!


이것도 전임 비서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상무는 원래 업무 능력이나 경력에 있어 휘하의 직원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무경험자였다. 협회 설립 당시 창립멤버로 영입되면서 회의록 작성과 총무일을 위해 과장급으로 영입된 사람이었는데, 다른 실무자가 없는 조직에서 부회장의 비서 노릇에 충실하던 그녀는 부회장의 추천으로 불과 1년 만에 전격 이사가 된 후 또 반년이 채 안 돼 상무로 승격했다. 덕분에 1년 반 만에 조직의 상무가 되었지만 실무는 아는 바가 없는 관계로 건드릴 수가 없으니, 직원들을 통제하고자 글자체나 줄 간격 등등 본인의 수준대로 마이크로매니징을 하며 끈질기게 직원들을 깎아내리는 가스라이팅을 해댄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업무가 회의에서 결정되면 다른 직원들과 이를 분담하여 진행할 생각도 못한 채 팀장들을 총알받이 삼아 자신의 입맛대로 업무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상무를 통제할 유일한 상사인 부회장 또한 일이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다, 약점이 있는 터라 상무를 막아서기는 커녕 방어벽을 쳐주고 있었으니, 단기간에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제로라 보는 게 맞았다. 결국 세 사람은 각자 경력을 살려 최대한 신속하게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1년이 채 안 돼 차례차례 회사를 떠났다.


이렇게 본인의 업무 역량이 모자라는 상사가 마이크로매니징을 시도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하다. 이런 경우 당하는 직원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상사 본인이 직원에게 얕보이거나 따라잡힐 수 있다는 불안에서 시작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원이 아무리 상사의 지적이나 요구를 받아들이고 개선하고자 노력해도 불안에 사로잡힌 상사가 마이크로매니징을 멈출 가능성은 적다. 직원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본인의 손에 잡히는 분야, 매일매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업무에 대한 의미있는 피드백은 전혀 받을 수 없고 어이없는 지적질이 이어지므로 역량이 뛰어난 직원일수록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또한 견딜 이유도 없으므로 뛰어난 직원들이 연이어 조직을 탈출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하지만 역량부족의 상사에겐 이것이 바라던 바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본인의 불안감이 낮아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직원을 내보낼 수 있다면, 그의 전략은 통한 것이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승진시켰을 때, 그리고 일단 승진한 이를 통제할 확실한 시스템이 존재할지 않을 때 그에 속한 조직은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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