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부엌으로 갈 뻔했던 도서관 카드

단어의 서랍, 오해와 이해의 기록

by 또마

나는 도서관 카드를 부엌에 둘 뻔했다.


어쩌면, 내 문해력이

길을 잃은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1. "부엌에요?"


샌디에이고에서 도서관 회원 카드를

만들던 날.

서글서글한 눈매의 직원이

두 장의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신용카드 모양의 카드는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쓰라고 했다.

그리고 구멍이 뚫린 작은 카드를 건네며,


“이건… 부엌(Kitchen)에 두고 쓰세요.”


순간 사고 회로가 멈추고

내 표정이 굳었다.

왜 도서관 카드를 '부엌에?'


곁에 있던 딸아이가 돌아봤다.

“아빠~ 이해 못 했지?”

“응… 왜 부엌에 두고 쓰래?”



하하하하

“아빠, kitchen이 아니고


keychain(열쇠고리)야!”


그제야 직원의 발음이

머릿속에서 다시 들렸다.


익숙한 단어의 인력에 이끌린 나는

낯선 ‘열쇠고리’ 대신

더 익숙한 ‘부엌’을 먼저 떠올렸다.


소리에 이끌려

뜻을 잠시 놓치는 순간.


문해력이 시작되는 계단에서,

나는 한 칸을 헛디뎠다.




2. 고지식


인터넷에서 본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한 학생이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고지식해요.”

뜻을 묻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지식이 아주 많다는 뜻이에요.

높을 고(高), 지식…


그러니까, 고지식(高知識) 요!”


‘융통성 없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는 태도’

라는 의미의 '고지식'이,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한자어로

재조립되어 있었다.


'고지식’은 한자에서 온 말이 아니라,

옛 순우리말 ‘고디식다’,

즉 '성질이 곧고 바르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에는 마치 한자어 ‘固知識’처럼

오용되기도 하지만.


아이가 이해한 그대로의 순수함은

이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의미적 변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오해였다.

선생님을 향한 순수한 존경심이,

단어에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우리는 각자의 서랍 속에서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세상을 해석한다



내가 ‘부엌’을 꺼냈듯,

아이는 자신의 서랍에서

가장 귀한 ‘높을 고’를 꺼낸 것이다.


문해력의 두 번째 계단은

단어를 이해하는 힘이다.


20260306_084519.png “우리 선생님은 지식이 높아, 고지식(高知識)”



3. 도-모(どうも)


문해력의 가장 높은 계단은 단어를 넘어,

말과 말 사이에 숨겨진

의도와 맥락을 읽는 능력이다.

영어로는 이를 ‘Between the lines’,

행간을 읽는다고 표현한다.


일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길을 비켜주자, 상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도모(どうも).”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전달되었다.

감사인지, 인사인지, 가벼운 사과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사전적 의미는 ‘정말로’라는

부사일 뿐이지만,

나는 그날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空氣)라는 행간을 통해

그 말을 이해했다.


샌디에이고에서는 소리(Sound)에서,

아이의 글에서는 단어(Word)의 의미에서

발을 헛디뎠다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모든 계단을 건너뛰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행간의 문해력(Between the lines)

경험한 셈이다.


20260306_084336.png “아, 도모(どうも).” 행간을 읽는 마음



4. 단어서랍을 열어

-함께 읽기-


문해력이라고 하면

글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떠올리지만

하루 동안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은

책 속에만 있지 않다.


누군가의 한마디, 표정, 잠깐의 침묵.

우리는 그 모든 것 속에서

끊임없이 읽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문해력은

읽기의 기술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감각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단어 하나를 다르게 이해할 때도,

서랍 속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된다.

모아 놓은 단어가 어떤 의미로 채워져 있는지.


서랍이 아직 덜 채워졌거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어를 뒤적이며,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일 테니까.


우리가 할 일은

틀렸다고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랍에 단어를 차곡차곡

채워 넣도록 돕는 것일 뿐.


언젠가 아이들이 단어의 뜻을 넘어

말 사이의 공기까지 읽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나눈 셈이 될 것이다.


부엌으로 갈 뻔했던

그 도서관 카드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문해력은

타인의 서랍을 살피며

함께 살아가는 온도

맞추는 감각임을.




문득, 딸이 보고 싶다.

단어서랍을 함께 뒤적여주던.







아이들이 서랍에

단어를 잘 채울 수 있도록

나무라지 않고

가만히 곁에서

–또마–




20260306_084922.png "그래, Hello는 아니야~"





[말말말, 내 맘대로 사전(私典) 04]

키체인(keychain)





격주 수요일 밤 9시,

서랍을 하나씩 엽니다.


[다음 서랍]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까, 먼 사이일까”

거리를 측정하는 마법 단어, 도-모(どうも)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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