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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송희 Sep 28. 2020

쉿!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2018년 KB창작동화제 입선작

<2018년 수상했던 단편동화 '쉿!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입니다.>


‘빨간 글씨 사건’이 처음 터진 건 일주일 전 체육 시간이 끝난 뒤였어요.

피구 시합을 하던 중 선영이와 소은이가 말다툼했는데, 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 보니 누가 선영이 실내화에 빨간 글씨로 ‘레알 극혐’이라 적어놨지 뭐예요? 선영이는 순간적으로 소은이를 노려보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체육 시간에 교실에 남아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문제는 아무리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선영이는 온종일 ‘레알 극혐’인 실내화를 신고 다닐 수밖에 없었죠.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며칠 전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큰소리가 나서 나가봤더니, 축구부 주장인 상철이가 자기 축구공을 들고 씩씩거리고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공에 빨간 글씨로 ‘ㅂㅅ’이라 적혀있었어요. 상철이는 2학년 통틀어서 싸움을 제일 잘하기 때문에 학교 친구들은 혹시 불똥이 튈까 봐 시선을 피하며 각자 교실로 들어가기 바빴어요.

“걸리기만 해 봐. 감히 내 축구공에 이런 짓을 해!?” 상철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글자를 지우려 했지만, 역시나 지워지지 않았어요. 다들 지난번과 동일범이 아니냐며 수군댔지만, 이번에도 역시 증거가 없어 범인을 잡을 수 없었어요.

사건은 일주일 만에 2학년 전체에 퍼졌어요. 각 반에서는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사물함, 안경집, 체육복, 교과서에 ‘급식충’,‘빼박’,‘대존 못’,‘개씹 극혐’,‘졸라 민폐’ 등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는 제보가 속출했어요. 피해자는 늘어 가는데 범인은 잡히지 않으니, 급기야 2층 복도에 귀신이 산다는 괴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웬걸. 범인을 찾는 일은 말 한마디면 충분했어요. 오늘 종례시간에 찬영이가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찐따 색히’라고 적혀있는 자기 가방을 들이밀며,“야, 한지훈. 네가 그런 거 아니야?” 라 말하는 바람에 내가 용의 선상에 올랐으니까요.

“무, 무슨 소리야. 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찬영이의 큰 목소리에 친구들이 일제히 날 쳐다보는 바람에 심장이 쿵쾅거려서 말까지 더듬고 말았어요.

“여기 써진 글자. 내가 어제 게임을 하다가 너한테 한
말이잖아!” 찬영이의 말에 반 친구들이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억울한 마음에 “증거가 있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미 반 아이들은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어요.

“야, 한지훈. 너였냐? 나한테 ㅂㅅ이라고 한 게?” 설상가상으로 우리 반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상철이의 말이 더해지자, 나는 한순간에 ‘용의자’에서 ‘범인’이 되고 말았어요. 친구들은 입에 내 이름을 올리며 쑥덕거리기 시작했어요. 더 끔찍했던 건, 웅성거리는 친구들 사이로 선영의 싸늘한 눈빛이 보였다는 거예요.

이제 그들에게 내 알리바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눈치였어요. 그들은 그저 ‘드디어 범인을 잡았다.’는 것에만 집중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나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의 참혹한 심정이란! 당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은 선생님께 내가 범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확실한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몰았다가는 단체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옆 반 상철이의 말에 동의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했던가요, 이미 2학년 반 전체에는 ‘1반 한지훈이 빨간 글씨 사건의 범인이라더라.’라는 소문이 쫙 퍼진 후였어요.

그 뒤로는 어딜 가나 친구들이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숨이 막혔어요. 게다가 틈만 나면 상철이가 우리 반으로 찾아와 온갖 심부름을 시키는 통에 기운이 다 빠졌어요. 덕분에 오늘은 4교시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급식도 포기하고 양호실로 도망쳤어요.

“흠. 이상하네. 열이 없는데?”
양호선생님이 입에 물고 있던 체온계를 빼며 말했어요.
“너, 꾀병이구나? 반에 꼭 한 명씩 이런 애들이 있지. 내 눈은 못 속여. 어서 교실로 돌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의심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던 선생님은 단호하게 돌아섰어요. 선생님의 등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올라왔어요. 나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그때였어요. 별안간 ‘ㄱ’부터 ‘ㅎ’까지의 자음들이 나란히 줄지어 창틀 위를 지나가지 뭐예요! 게다가 글자들은 모두 빨간색이었어요.

나는 헛것을 봤나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ㅏ’부터 ‘l’까지 모음들이 재빠르게 창틀을 지나쳐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어요. 스물여덟 개의 빨간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겼다가 하며 운동장 가운데로 향하고 있었어요. 공중에 떠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 위를 헤엄치는 용 같았어요. ‘어쩌면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실내화를 신은 채 운동장으로 뛰쳐나갔어요.

한참을 날아가던 글자들은, 일주일 전 교장 선생님이 세우신 세종대왕님 동상 앞에서 모습을 감췄어요.

벽에는 ‘정음 초등학교 개교 40주년 기념 동상’이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어요. 나는 동상 주변을 기웃거리며 사라진 글자들을 찾다가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싸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는데…. “으악!” 그만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요. 세종대왕님이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눈알만 굴려서 말이에요!

‘딩-동-댕-동’

때마침 시계탑이 12시를 가리키며 종을 울렸어요. 종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지자 어디선가 스물여덟 개의 글자들이 튀어나와 동상 앞에 순식간에 두 줄로 섰어요.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동상 뒤로 몸을 숨겼어요.

“일동, 좌 양 좌!”왼쪽 줄 맨 앞에 서 있던 ‘ㄱ’이 낮은 점프를 하며 말하자, 모든 글자가 몸을 틀어 왼쪽으로 돌아섰어요.

“대왕님께, 경례!”뒤이어 오른쪽 줄 맨 앞에 있던 ‘ㅏ’의 구령에 맞춰 글자들이 동상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어요.
세종대왕님은 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톡, 톡 두드렸고, ‘ㅁ’,‘ㅊ’,‘ㅅ’,‘ㅂ’ 네 글자가 기다렸다는 듯 중앙으로 나왔어요. ‘ㅁ’이 대표로 입을 열었어요.

“보고 드립니다! 우리 자음 국에서는 백성들을 제멋대로 묶어 욕설로 사용한 2학년 2반 박 모 군과 5반 정 모양의 물건에 찰싹 달라붙어 온종일 모욕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체육복 상의에 달라붙어 있을 때 정 모양의 구겨진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그래도 철 수세미로 옷을 문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따가워서 죽을 뻔했다니까요!”

옆에 있던 ‘ㅅ’과 ‘ㅂ’이 마치 영웅담을 늘어놓듯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자음 국과 모음 국의 연합 작전이 단연 으뜸 아니었겠습니까?”

‘ㅗ’가 가운데로 뱅글뱅글 돌아 나오며 말하자, 모음들이 일제히 ‘옳소! 옳소!’라 말하며 환호했어요. ‘ㅗ’는 그들을 진정시키더니 다소 침울하게 말을 이어나갔어요.

“제가 처음 모욕을 느낀 날은 제 몸뚱이가 가운뎃손가락의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로 욕설로 사용됐을 때였지요. 그 수치심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본디 한글이란 자음과 모음이 조화를 이뤄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는 위대한 문화유산인데, 요즘 아이들은 대왕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새로 만들어내니, 기가 찰 따름입니다.”

“허허. 듣고 보니 그것 참 요즘 말로 레알 극혐이로구나!” 세종대왕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하자, 백성들의 몸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어요.

문득, 저 글자들을 데려가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누명을 벗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팔을 쭉 뻗어 글자들 가까이 손가락을 가져갔어요.

‘좋아,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검지가 맨 뒷줄에 있던 ‘ㅎ’의 정수리에 닿으려는 순간, ‘ㅎ’이 뒤를 돌아 내게 소리쳤어요. 그의 외침에 나머지 글자들이 일제히 뒤로 돌아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라 말하며 우르르 나에게 달려들었어요.

처음에는 분명 스물여덟 글자였는데, 분신술이라도 쓴 건지, 삽시간에 그 수가 불어나더니 어느새 셀 수 없이 많은 글자가 나를 에워쌌어요. 나는 비명을 지르며 교실을 향해 뛰어갔지만, 벌떼 같은 그들은 한 목소리로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라 외치며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어요.

한참을 달린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가까스로 교실 안으로 들어갔어요. 급식을 먹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어요. “다들 숨어!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눈 깜짝할 새에 글자들이 교실 안 곳곳을 들쑤시며 친구들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어요!

친구들은 식판까지 동원해 달려드는 글자들을 쳐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어요. 급기야 글자들은 저들의 몸을 합치더니 친구들의 얼굴에 달라붙었고, 친구들의 뺨과 이마에는 하나둘, 빨간 글자가 생기고야 말았어요!

“아악! 이게 뭐야! 싫어!”
거울을 본 선영이가 울음을 터트렸어요. ‘극혐’이라 적힌 양 뺨에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어요. 손바닥으로 볼을 세게 비벼도 보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떼어내 보려고도 해봤지만 아무리 해도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어요.

“으앙. 엄마. 어떡해.”
곳곳에서 친구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그들이 내뱉었던 온갖 비속어들이 얼굴에 대문짝만 한 크기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죠.

어떤 아이는 자기 이마 한가운데에 ‘죽어라!’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벌써 죽기 싫다며 꺼이꺼이 울었어요.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1반의 완패에 연합군은 환호성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그들은 쉬지 않고 다음 반을 향해 일렬로 날아갔어요. 저 멀리 상철이가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어요.

“저것 봐봐! 지훈이만 깨끗해!”
한참을 훌쩍거리던 선영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지훈이는 평소에도 예쁜 말만 골라서 한다고 담임선생님께 칭찬받았었잖아.”

소은이의 말에 친구들이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를 쳤어요. 구석에서는 ‘예쁜 말만 하는 지훈이가 애초부터 이런 낙서를 했을 리 없지’라는 소리도 들렸어요.

“지훈아, 미안하다. 심한 말은 내가 했는데, 범인으로 몰아가기나 하고.”

찬영이가 화해의 악수를 신청하며 말했어요.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찬영이의 손을 꼭 잡았어요. 그러자 반 친구들이 하나둘, 자신이 뱉은 말에 상처 받았을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시작했어요. 한순간에 교실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부둥켜안은 선영이와 소은이의 모습도 보였어요.

나는 찬영이의 양쪽 뺨에 쓰인 ‘찐따’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려 친구의 볼을 쓰다듬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글자가 지워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얼른 반대쪽 볼도 쓰다듬었어요. 찬영이의 얼굴이 금세 말끔해졌어요.

“와! 한지훈 만세!”
거울을 보며 연신 ‘한지훈 만세!’를 외치는 찬영이의 뒤로 삼삼오오 친구들이 모여들었어요. 나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에 붙어있는 글자들을 정성스레 닦아주었어요. 마지막으로 선영이 차례가 되었어요.

“의심해서 미안해.”
선영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세종대왕님처럼 눈으로 인사를 하고 선영의 볼을 닦아주었어요. 뽀얀 뺨을 보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곧이어 내가 글자를 지울 수 있다는 말이 복도에 울려 퍼졌고, 나는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2학년 반 전체를 돌아다니며 친구들의 얼굴을 닦아 주었어요.

이상하게도 나쁜 글자들을 닦아내니 속상했던 마음도 같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상철이의 차례가 되자 축구공에 써진 글자들까지 말끔히 지워주었어요. 머쓱해하던 상철이는 깨끗해진 얼굴과 축구공을 번갈아 보며 나에게 수십 번은 더 고맙다고 말했어요.

방과 후에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세종대왕님 동상 앞으로 가 글자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어요. 친구들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동상 앞에서 잘못을 빌었어요. 세종대왕님이 만족스럽게 웃었어요.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빨간 글씨가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고, 더는 나쁜 말을 뱉는 학생들도 없었어요. 그렇게 ‘빨간 글씨 사건’은 우리 학교의 ‘전설’로 남았어요. 동시에 등굣길에 학생들이 세종대왕님의 동상에 꾸벅, 인사를 하는 일은 ‘정음 초등학교’만의 전통이 되었고요!

시간이 흘러 ‘정음 초 전설’은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있는 모든 초등학교에 퍼졌어요. ‘나쁜 말을 하는 친구에게는 정음 초 전설의 말로 응징하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으니까요.

새로 만난 짝꿍이 자꾸 비속어를 쓴다고요? 그럼 이렇게 말해보세요.

“쉿!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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