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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26. 2020

< 라면 >

2020.8.25.  /  D-128  /  임신 21주

(이럴 수가, ‘스프’가 표준어가 아니라니...)


라면은 다이어트의 적이다. 튀긴 밀가루도 문제지만, 스프는 가공할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몸은 적당한 염분 농도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지니고 있는데, 맵고 짠 성분이 집약된 스프를 먹으면, 몸은 항상성 유지를 위해 더 많은 수분을 머금으려 한다. 이로 인해 배출 능력이 덜 발현되고, 몸이 커진다. 또한 수프 속 일부 성분은 온도가 낮아지면 고체로 변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혈관을 막히게 하거나 굳게 할 수 있다.


라면은 쉽다. 언제든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굳이 조리법을 보지 않아도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으며 설거지 거리도 적다. 개성을 살려 본인 입맛에 맞게 조리할 수 있으며 종류도 많아 생일상까지 차릴 수 있을 정도이니, 가히 만능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최근 다이어트를 하는 동안, 라면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배척했다. 라면을 끊은 직후엔 금단증상을 느끼다가, 한 달쯤 지나자 아예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처음엔 퍽퍽하고 지루했던 단백질 셰이크나 닭가슴살 가공 제품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감춰졌던 목이 일부나마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참 좋았다. 나중에 뚱이에게 아빠곰이 뚱뚱한 건, 곰이라 그런 거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눈에 라면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싶어 졌다. 정확히는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애버리고 싶은 건 고개를 떨궜을 때 발등을 가리던 두툼하고 둥근 뱃살들이었는데... 만병의 근원!!


회사 사무실 냉장고 위의 새우탕 컵라면을 꺼내 닭가슴살을 토핑해 먹었다. 현미 쌀밥까지 말아먹었다. 맛은 없었다. 귀가해 마트에 가 라면을 샀다. 새우탕면의 실망감에 조금은 성격이 다른 짜장라면을 선택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짜장면을 집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 묶음에 4개만 들어서다. 일요일에 요리사로 만들어주는 건 5개 들었는데. 아직 다이어트에 대한 미련은 좀 남아있었다.


세상 문제들의 근원은 뱃살이기보다는 라면이다. 아니지, 라면인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한 번 꽂혀버리니 그것만 보였다. 라면만 없었더라면 어떤 문제든 그렇게까지 문제가 악화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라떼’의 묵은 향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지만, ‘라면’의 풍미는 아예 정신세계를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 '라떼'보다 '라면'이 더 무섭고 싫어지기 시작했다.


따옴표 언론이 확산하며 유명인의 말이 이슈가 되는 세상이다. 한 개인의 발언이 주식시장에서 수조 원을 움직일 정도로 파급력이 상당한 경우도 있다. 요즘은 이런 개인을 ‘인플루언서’라고 칭한단다. 이들이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정하면 이외의 방법은 맛있게 끓이는 법이 아니게 될 정도 영향력이 상당하다.


문제는 이들 중 좀 배운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끓이는 라면이다. 이들의 라면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옛날 것들이나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먼 미래의 것들까지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 이들은 라면을 끓이면 피해 갈 구멍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힘도 안다. 흔히 프레임이라고들 하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속담을 역이용하는 것인데, 그건 굴뚝이 아니잖아 이 오랑우탄뒷다리똥구멍들아. 라면의 풍미로 사람들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고 싶어 하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닐 거라 믿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닌 게 아니다.


“만약 그 당시 A가 똑바로 했더 ‘라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B 정책은 1% 부족합니다. 좀 더 완벽했던 ‘라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겁니다.”

“우리의 정책적 대응이 없었던 ‘라면’ C는 여전히 문제였을 겁니다.”


Would you please, 닥... 닭가슴살!?

퍽퍽하다. 제법 맛과 재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금세 이렇게 목 멕히는 음식이 돼버리다니....


라면은 쉽다. 쉽게, 어떤 상황에서도 끌어다 쓸 수 있다. 앞 뒤 문맥은 좀 따져야겠지만, 논증의 구성요건 따위의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수습할 거리도 거의 없다. 본인에게 익숙한 예시를 들 수 있으며, 행여 적절하지 않은 예시를 선택해도 ‘틀렸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 만능 키이기도 하다.


이거 이거, 이제는 무시하고 배척하기만 하면 안 되는 수준이 돼버린 것 같다. 과거의 것을 소환해 지금의 문제가 그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꾸미거나, 지금은 이전보다 낫다는 집단최면을 유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단편적으로 제시해, 흑빛을 장밋빛으로 보게끔 눈을 멀게 하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자정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불필요한 건 시원하게 배출해야 하는데, 계속 놓지 못하고 더 많이 쌓아두려는 것 같다. 소통의 흐름이 막히고, 경직된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역시 라면인 건가.


지겨울 만도 한데, 오히려 더 난리인 것 같다. 에휴, 김치를 없애야 라면이 없어지려나? 모르겠으니 일단 이틀 전에 산 라면이나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라면을 하나라도 줄이는 보람된 일을 거행하는 거다, 암~.


재택근무하는 아내가 거래처와의 화상 미팅에 한 눈 팔린 사이 프라이팬에 물을 올렸다. 짜장라면은 프라이팬에 끓이는 게 제 맛이다. 마치 웍에 조리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작한 물이 끓어오르면 면을 넣고 조금 익히게 뒀다가 두 겹으로 붙은 부분을 분리한다. 면까지 자작하게. 그리고 이렇게 스프를 털고 넣으려는데,


“나도 짜장라면.”

“응? 방금 배부르다 하지 않았어?”

“응, 근데 이제는 배고파. 나도 한 입 먹을 거야. 뚱이도 배고프데.”

“아, 뭐야 확실히 말해. 아무리 뚱이가 달라고 해도 단 한 입도 줄 수 없어. 그냥 하나 더 끓여?”

“응.”

“아씨, 진작 말했더 ‘라면’ 좋았잖아. 이거 면 거의 다 익을라 해서 스프 넣으려 하는데”

“완전 다 익기 전에 말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 라면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까지는 아닌가 보다. 이렇게 간단하게 뭉갤 줄이야.


뚱이가 오지 않았더 ‘라면’

뚱이가 남자아이 ‘라면’

뚱이가 내 이마를 닮을 것이 ‘라면’

똥이가 2020년에 태어날 것이 ‘라면’


라면은 현실이 아니다. 가능성은 팩트가 아니다.


짜장라면은 좀 맛났다.  라면.. 여전하군, 훗!

아, 그러고보니 셋이 먹는 첫 라면이네!!!


그나저나 당분간 눈을 내리깔거나 발을 쳐다보진 말아야지. 대신 체중계와 거울을 배척하고 멀리 해야겠다. 피유.... 역시 아빠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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