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마지막, 장준환 감독은 딱 30년 전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27일 개봉한 영화 < 1987 >의 이야기다. 2017년 대한민국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았던 1987년의 대한민국. 정도 차는 있을지 몰라도 그 핵심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진실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 1987 >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 위해 존재했던 민주항쟁의 역사를 정조준한다. 옆길로 새거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1987년 6월 뜨거운 함성이 만들어지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뚜렷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비춘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어처구니 없는 대사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일을 은폐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기자, 학생, 민주화 운동가 등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대립한다. 영화는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해 그것을 파고들 줄 알았지만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내든다.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밝히려는 최검사(하정우 분)에 감정이입 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금세 동아일보 사회부 윤기자(이희준 분)에게로 넘어간다. 박종철 사건에서 이한열 사건까지 < 1987 >은 특정 사건을 보여주기 보다 일련의 연속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 1987 >에는 악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특정한 주인공은 없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절대 악(惡)의 공간은 존재하지만, 악당에 대적하는 주인공은 매번 바뀐다. 그러나 관객이 이입할만한 영화적 시점은 일관적이다. 시퀀스마다 주인공은 바뀌지만 하나의 점층적 흐름을 만들어, 영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시대적 차원으로 영화의 시점을 영리하게 치환한다. 1987년이라는 역사적 시공간을 주인공 삼아 그 어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동기보다 강력한 추진력과 몰입력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 간다.
"나서지 말아. 나서다간 너만 당할꺼야." 남영동 대공분실은 대공이란 명분 아래 폭압적 분위기를 조장한다. 비뚤어진 가족주의로 조직을 유지하고, 권력의 비호아래 헌법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누구든 잡아 고문했고 고문이 통하지 않을 시에는 가족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공포의 시대다.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동시에 자유와 진실이란 대의를 위해 용기내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성실하게 재현한다. 검사와 의사, 기자와 교도관, 종교인과 그리고 대학생들. 위기의 순간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혼돈에 빠트린 것은 다름 아닌 소시민들의 용기였다.
< 1987 >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희열을 느낄만한 장면은 평범한 대학생 연희(김태리 분)가 광장으로 뛰쳐나가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연희는 가요를 좋아하고 의도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피했던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희가 시민으로 가득찬 광장에 참여해 함께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운동권을 기피한 그는 군부 탄압이 내 일상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두려워 하지 않고 나선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희생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지만 1987년은 결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날 거리로 나선 수많은 소시민들이 있었다. 폭발했던 역사적 사건 아래 뜨거운 용광로를 영화는 안고 가져간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비극적 역사를 극적으로 묘사해, 신파적 장면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최대한 이를 배제한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비련하게 그려내지도 않는다. 시도때도 없이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 당하고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득할지라도, 영화는 그들의 눈빛만은 떳떳하게 묘사한다. 스크린을 보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도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용기를 내고 권력에 저항하려는 이들의 기백 때문이다.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남영동 대공분실에 제압당했지만 그들의 용기는 결국 끊어지지 않는 흐름을 만들었고 그것이 파장이 돼 큰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옳은 일을 실행하고 절차와 법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요원했는지,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 상식적인 세상에 얼마나 큰 댓가가 필요했는지, 꽁꽁 얼어 붙은 언 땅을 녹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1987년의 대한민국을 영화는 재현하고 있다. 하정우, 김윤석, 설경구, 박희순, 강동원, 오달수, 고창석, 김태리, 여진구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함께 출연한 만큼 영화 < 1987 >은 용기 있었던 시대에 바치는 충무로의 헌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가 가진 무게감이 부담처럼 다가올 법도 했지만 <화이> 이후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장준환 감독은 시대적 배경과 배우들의 연기를 조화롭게 엮어 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그때와 지금을 엮어놓은 감독의 연출은 가장 감동스러운 부분이다. 영화 < 1987 >은 1987년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2017년 우리의 거울이기도 하다. 올해의 마지막, 지난 겨울 광장 아래에서 진실과 정의를 위해 삼삼오오 모였던 우리들이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보이는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