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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Oct 11. 2021

100번 실패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

<버드맨>

나는 지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에 끼지도 못한다. 방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서 젤리를 먹고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벌였던 뻘짓거리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항상 무언갈 수습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면 상대방도 다 알게 되어있다. 난 이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어 항상 후회를 한다. 그게 심각한 잘못까지는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나 자신에게 솔직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순간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었다가 줘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구린 인간이 됐다.


 이런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 때면 가끔 누군가가 날 따라오는 것 같다. 언젠가 아이언맨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언급했던 아이언맨이 내 주위에 있는 것 같다. 그냥 하지 마. 어차피 다 너를 떠나게 될걸. 토익? 그렇게 오래 붙잡으면 실력이 느냐? 너는 그냥 머리가 안 좋지 않아? 걱정을 뭣하려 해. 네가 바라는 거 다 안 이루어져. 온갖 폼은 잡지만 넌 결국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지. 그동안 헛짓거리 한 거 기분이 어때? 아이언맨은 비브라늄으로 만든 슈트를 입고 있어서인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잡념의 시작은 내 이상한 행동에서 왔다. 무슨 글을 쓰고 어떤 방식으로 날 위로해도 많은 게 날 떠났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미련과 후회를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문득 나 자신을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다. 지워버릴 수 있다면. 미안한 이들이 꼭 행복할 수 있다면. 아예 없던 일로 돌아갈 순 있을까. 창문을 열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버드맨>은 자아의 회복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마이클 키튼이 리건으로 나온다. 리건은 왕년에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름 꽤나 날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위치는 퇴물 그 자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으로 세상에게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당연히 쉽지 않다. 나오기로 한 배우의 머리 위에 조명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함에 따라 대체 배우를 구해야 했던 리건. 제레미 레너나 마이클 패스밴더를 호명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기 때문에 연극 대타에 호응해 줄 리가 없다. 유명 배우 마이크 샤이너를 섭외한 리건. 샤이너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성은 파탄이지만 연기력이라면 둘째 가면 서러워 처음 대본 리딩 때도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대타의 연기력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리건. 그러나 연극에서 변수가 생겼다.


연극에 베드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급발진을 해버린 마이크가 상대 여자 배우에게 연기가 아닌 실제로 해보자!라고 말한 것이다. 술 한 병 마시고 연극에 들어간 게 화근이 됐다. 어쨌든 연극은 잘 끝났지만 상대역 레슬리는 상처를 받았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돌발변수에 화가 나버린 리건은 마이크를 해고하려 한다. 그러나 마이크가 가진 티켓파워가 있어 그것마저도 쉽지 않고, 이어진 딸과의 말싸움에서 '아빠는 트위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멘탈이 무너질법한 상황들이 하나하나 쌓이다가, 뉴욕 한복판에서 팬티만 입고 후다닥 달리는 상황까지 겪게 된다.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연극 준비 과정에 무언가 깨달은 듯 리건은 공연 당일날 뭔가를 결심한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그는 결국 마스터피스를 완성해 세상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버드맨. 직역하면 '새(같은) 남자'라는 뜻이다. 새는 날개를 통해 하늘을 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거의 날지 못한다. 비행기 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그건 아마 사람이라는 동물의 특성상 그럴 것이다. 팔로 부채질 몇 번 한다고 해서 그게 감당이 되나? 당연히 아니다. 건장한 팔다리와 뇌가 있으니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은 사람의 본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거야 당연히 밖으로 걷지 못하면 맛있는 것들을 갖고 오지 못하니까. 이를 반영하듯 난 아닌 밤중에 배가 고파서 세븐일레븐에 허니버터 칩을 사러 갔다. 원래 사람은 배가 고프거나 졸리면 참지 못한다. 되게 당연한 명제이기도 하다. 근데 그 본질적인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이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난 가끔 나에게 물어본다. 왜 그걸 쓰고 있냐고. 나는 돈 많이 벌고 싶다. 엄마 아빠한테 효도하면서 내 인생 잘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옳은 선택을 하는지 증명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그건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40여 편의 글을 썼던 이유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이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시각이 넓어지고, 또 작품과 관련 없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난 나 자신에게 이 두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고 되뇌었고 몇 달 동안은 실제로 그러고 있다. 직업적인 무언가와 정서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건 별게 아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창작의 동기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나 역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똘똘이, 다른 이에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멍청이더라도 나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영화 <버드맨>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사랑받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아니다. 사람 마음 얻는 건 손 꼽힐 정도로 어렵다. 근데 막상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 무슨 말이냐? 우리는 필연적으로 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뜻이다. 난 잃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무언가를 탓해왔었다. 이는 모두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관 계고 영화고 예술이기 때문에 좋은 것 나쁜 것 다 각기 개성이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 좋은 것을 탓하며 시간을 보내다 정신 차려보면 나는 한 꺼풀 성장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내가 얻은 것도 분명한데 잃은 것에 대해서만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버드맨>은 제안 하나를 건넨다. 무대에 올라서라는 뜻이다. 겁을 먹었건 원래 대인기피라 사람들 앞에 못 나서건 상관없으니 일단 뒤로 숨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인생을 살면서 내가 바랐던 것 오 전부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완성의 존재라 무언가를 실수할 수밖에 없고 가끔 우리는 이를 실패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원래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인생 전부를 근사한 순간으로 채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뭔가를 잃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연극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극은 삼라만상의 인간형을 반영하는 예술이기에 나쁜 사람, 안 맞는 사람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이에 따라 각자의 배역이 다르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연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었는데 연기를 소재로 했다는 건 난 분명히 연기와 현실을 동일시 키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연극배우로 나서는 극 그 자체나 이 <버드맨>이 누군가의 연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분명하게 대칭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더 있다. 드럼과 롱테이크다. 드럼 연주자는 극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막 등장한다. 마치 이냐리투 감독이 '이건 대놓고 허구예요'라고 넌지시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서의 현실고 연극의 구분선이 얕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롱테이크 역시 '인물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따라 한 갈래로 나뉜다. 현실은 롱 테이크고 숏 테이크고 그런 거 없다. 일단 눈 떠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롱테이크인 셈이다. 마치 이 영화의 카메라 촬영 기법처럼. 영화는 이 두 가지 소재를 뒤섞은 후 이 극과 현실의 공통점을 뽑아내서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영화 후반부 리건의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를 추론만 할 수 있는데, 나는 감독이 쉬운 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난 애초부터 이냐리투 감독이 키건의 선택에 대해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포트라이트를 주면 그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린다. 이 사람이 왜 죽었을까. 우리는 이 선택에 대해 논의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명예회복에 성공한 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이냐리투 감독은 처음부터 죽음을 빼버렸다. 아니 사실 누가 봐도 죽을법한 상황에 죽음을 생략하는 과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후반부의 죽음을 생략하는 수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 건 영화의 메시지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에서 내포하는 주요한 메시지는 인생의 역설이다. 세상에게 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그가 골랐던 선택지가 무엇인가. 연극이 그 선택의 전부였을까? 물론 그의 명예회복에 연극이 좋은 매개체가 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다. 팬티바람으로 뉴욕 한복판을 달려가거나 총으로 했던 자살시도가 그의 명예회복을 도운 것들이었다. 완전 대놓고 드러나는 아이러니다. 연극을 통해 사랑받고자 했던 그는 연극 외적인 요소가 내부의 관심으로 환기되는 경험을 했다. 영화는 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생은 연극과도 같다. 싹수없는 후배 놈이 내 연극을 망쳐가며 퀄리티를 떨어트릴 수도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것 외의 요소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인생을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넘어져야 한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기본적으로 역겹고 모순적이다. 아닌 사람 있나? 내가 무언갈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즉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 무조건 아름답지는 않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키건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요. 창문 밖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스스로의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질 것인지, 아니면 실패가 두려워 사람들 앞에 숨을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우리 인생은 기본적으로 모순덩어리라 사랑받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그랬고, 당신이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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