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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Oct 28. 2021

다시 한번 자라나는 풀잎들처럼

<풀잎들>

더운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졌다. 앞의 남자는 요즘 유행하는 나이키 덩크와 아이앱 후드를 입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는 서울 덩크를 신었다. 나도 집에 저런 거 있는데. 항상 어디서 일을 하면 무언가를 사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는 나는 돈 쓰는 것에서 재미를 찾아야 했다.


근데 요즘은 또 다르다. 익숙한 것들에서 아무 재미도 찾지 못하겠다. 뭘 원해서 이렇게 살았던 걸까? 열심히 외웠던 단어도, 대비하고 싶던 파트 5도 영 시원찮으니 하루 사는 낙이 뚝뚝 떨어졌다. 영화도 재미가 없다. 돈이 있어도 하루에 쓸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뭐 좋은 것 사도 입을 일이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모든 게 식상해진 나는 늘 항상 하던걸 한다. 위로가 되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소울>을 볼까 생각한다. 아. 이거만 있으면 안 되지. <꿈의 제인>도 있다. 막상 재생하려니 손이 안 간다. 리뷰를 한번 더 써볼까? 할 말은 많은데 다루고 싶은 작품이 없다. <중경삼림>과 <노매드랜드>가 같은 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써내려 보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다른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운동도, 공부도,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천히 걸었다. 찬바람이 드는 가을 왠지 모르게 시든 풀잎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건 다 정해져 있다. 영원한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한 개소리고, 많이 사랑한 사람은 무조건 지게 되어있으며 영화는 러닝타임이 있어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다. 모든 생의 과정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나는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풀잎들>은 식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나간다. 영화는 이 감독의 초기작들처럼 인물의 위선이나 욕망을 조명하지 않는다. 홍상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끝이 난 후의 정서다. 이후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는데, 이는 끝이 난 다음의 사람들과 흑백영화라는 연출 의도가 버무려져 시너지를 낸다. 홍상수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데 능한 예술가라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깨달은 인물인 것 같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거대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물론 매력 있지만 홍상수는 이와는 반대로 셔츠에 와이드 슬랙스만 입고도 조곤조곤한 톤으로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풀잎들> 이런 특장점이 더 부각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장면 변환도 잘 없고 롱테이크가 주요하다. 간단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식물들도 이 특성들이 적용된다. 식물을 오랫동안 째려보면 일단 눈이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풀들은 조용히 부대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풀잎들처럼 잔잔하다. 조용히 러닝타임 1시간이 지나간다.


근데 이 영화는 절대 조용한 사운드만 품고 있지는 않다. 첫 번째. 두 남녀는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클래식 소리만큼이나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란 말이 들린다.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큰 소리가 오간다. 마음이 아파 카페 밖을 나가는 남자. 밖에서 담배 한 개비를 핀다. 아름은 그걸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는 아름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겠지? 아름은 혼잣말을 한다. 사연이 있겠지. 누군 없을까?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마치 우리에게 반문하듯 내레이션을 읆는다. 다음 사연이 비친다. 중년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세상을 뜨려고 했었나 보다. 원인은 누군가와의 사랑이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갔는데도 남자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 악물고 대화 파트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하던 남자. 같이 대화하던 중년 여자는 당연히 거부한다.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정리를 해야 할 때'에 관해 논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어차피 끝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인 셈이다. 아름은 이 중년 남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하다. 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남자를 보며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체념한다. 카메라는 다음 두 사람으로 넘어간다. 다른 중년 남자와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고 있다. 남자는 배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남자의 제자쯤 되는 것 같다. 여자는 웃으며 남자에게 '저 연애해요'라고 답하고 남자는 환하게 '그래,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다 사랑이 안 돼서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금 남자는 아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대시한다. 둘이 같이 동거하자는 제의다.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나 보다. 아름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아름은 가는 동안 제일 처음 지켜봤던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휙 지나간다.


동생 커플을 만난 아름. 아름이는 동생과 이야기하다 갑자기 화를 낸다. 사랑은 개뿔. 누군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하니? 갑자기 동생 커플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그 옆자리에선 젊은 여자와 중년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년 남자의 친구는 교수고, 이 여자와 불륜관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교수의 친구는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 교수의 친구가 여자에게 '당신은 그 사람을 갖고 놀았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시선 피하며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바로 다음 장면. 카페 밖에서 중년 남자와 만났던 여자가 느닷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마치 올라가서 봤던 것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여자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다.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여자. BGM으로는 클래식이 나온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서 아름은 동생을 호명한다. 뒷골목에서 동생에게 화를 내는 아름. '넌 누군지 알고 걔를 만나는 거니?'라고 말한다. 동생은 누나에 대해 '좀 힘든 구석이 있어'라고 말한다. 아름은 어느 가게에 들어와서 앞의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맥북에 글을 쓴다. '사람들이 만나는구나. 서로 감정이 부딪히고. 서로 힘을 내고. 서로 같이 서서 있게 되는구나. 숨겨서 먹는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있을까. 왜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까. 저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귀하고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라고 답한다. 다시 첫 번째 남녀로 돌아간다. 한바탕 불타오르고 난 후 둘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둘은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같이 한 잔 들이켜게 되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클래식과 함께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아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지금은 너무 귀한 거니까. 너희들이 부럽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 내가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 아름의 독백이 끝나고 카메라는 동생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줄거리에 대해 쭉 썼다. 사실 이것은 그냥 내가 노트북을 가져가서 카페를 관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상은 이렇게나 심심하고 별 것 아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영화를 좋아하는 모두들은 이미 우리 삶에서 반전 같은 건 드물다는 걸 알고 있다. 전적으로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래 필연적인 결말이 있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감정을 쓴다. 맛있는 건 언젠가 다 먹게 되어있고 돈도 다 쓰게 되어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난다. 빛나던 커리어도 언젠가 끝이 있다. 그걸 애써 부정하면 나 자신만 추해지는 것이다. 근데 나는 항상 더 욕심을 냈다. 결과는 참혹하다. 번번이 좌절한다. 이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타인은 어쩌겠는가. 내 아빠가 대통령이건 법무장관이건 검찰총장이건 원래 자식들은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사실 우리 아빠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안다는 게 원래 그런 거고, 우린 절대로 타인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지나가다 본 풀잎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엄연히 남이기 때문이다. 갈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치가 아닐까. 우습게도 우리는 이런 삶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듯 초반부터 죽음에 대해 제시한다. 근데 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다방면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남녀는 '죽은 후에도 함께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이라는 키워드로 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남녀는 '죽었어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남녀는 '죽음이 드리우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남녀는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남녀를 제외하곤 이 들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 남녀는 이내 커플이 되어 서로의 굳건한 사랑을 재확인한다. 네 번째는 후의 미래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함께 동석을 하며 술을 마신다. 그러니까 후회와 미련으로 보냈던 사람들의 후는 보여주지 않은데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동석을 시켜 엔딩부에 풀잎들과 함께 노출시킨 것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홍상수가 허무함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쪽이다. 간단하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은 쪽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미래가 없고, 큰 사건이 있는 후에도 본인의 모습과 변함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 후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칭을 이루는 것과도 닿아 있다.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한 남녀’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누나인 커플’로 전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름이 ‘잘 알아보고 연애를 해야지’라는 훈수를 뒀다. 완벽한 대칭이다. ‘주변인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상대를 잘 모르면서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동격으로 놓인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정확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그런 홍상수의 세계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감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었으니까. 그리고 이 첫 번째 연출 의도와 두 번째 연출 의도는 병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두 남녀 중 세 번째, 김새벽과 정진영 배우가 나온 부분들을 보자. 둘은 현재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글은 원래 혼자 쓰는 거예요. 사랑이 최고야. 뭐 이런 주제로 말을 이어간다. 이 현재를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 중 여자가 극의 중반부 즈음에 느닷없이 계단을 왔다 갔다 한다. BGM은 바그너가 만든 ‘탄호이저’와 관련된 음악이 나오는데, 나는 이 탄호이저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행위도 연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일단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사실 되게 해석하기 쉽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런 필멸의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거겠지? 또 바그너가 쓴 탄호이저 극본은 ‘희생에 의한 구원’이 주요 모티브라고 한다. 한 여성이 타락한 남자를 위해 희생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것도 이 <풀잎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아닌가? 현재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기에 현재에 있는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뭐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첫 번째 ‘원인에 대해 모르면서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죽음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 홍상수는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롭게 끌고 가는 감독이었는데, 이런 부분 역시 풀잎이라는 식물의 속성과 계단이라는 도구의 특징을 활용해서 삶에 은유했다. 참으로 홍상수스러운 연출법과 감정 활용이다. 후반기의 홍상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심심할 정도로 잔잔하지만 지켜보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세지를 전한다. 당신은 풀잎이 될 것인가, 지는 꽃이 될 것인가. 우리는 사실 이 답을 알고 있다. 모두 다 언젠가 다시 사라질 운명인데 항상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 아니, 홍상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꿈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미련 가득한 과거였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어도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영화가 말하는 바에 예외가 되는 인간이 아니다. 오늘의 나는 필연적인 결말에 부딪힌 사람이다. 아무도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지만 난 질투인지 뭔지 버림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다. 눈물. 웃음. 누군가를 위해 흘려본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인생일까. 난 그래 봤으니 썩 좋은 삶을 살았던 걸까. 모르겠다. 나도 나밖에 모르는데 타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버려지는 게 두렵다. 호의와 애정으로만 모든 게 유지된다면 인생이 쉬워질 텐데 당연히 택도 없다. 유달리 마음이 어두워 수렁에 빠진 오늘 나는 내 마음속에 다르게 피어나는 풀잎들을 꿈꾼다. 어차피 누군가는 나를 떠날 텐데. 사회성이 그렇게 좋지 않아 인간관계가 좁은 게 슬프다. 또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어차피 산다는건 비극적이라 돈도 없어지고 명예도 사라질 것이고 사람들도 나를 떠나지 않을까. 이제 세상에게 상처 받는 게 무서워 과거에 안주하고 싶다. 그래도 언젠간 나아지지 않을까. 내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길 바라본다. 이 영화가 나의 풀잎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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