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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Mar 19. 2022

3시간을 돌아 도착한, 어디에도 없던 여행

<드라이브 마이 카>,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난 <아사코>를 좋아한다. 뭐랄까, 난 이 이야기가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같은 순간이 조금씩만 다르게 벌어진다고 해서 사람이 더 나은 선택지만 고른다는 보장이 없다. 굉장히 멀리서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길만 걷는다. <아사코>는 이것이 삶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더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두 인물의 미래를 어마장장하게 긍정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비틀었다는 것이, 바라는 대로는 이뤄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삶은 기회를 준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작품 자체가 워낙 탁월하니 막연하진 않더라도 현실적인 희망을 얻고 싶은 분들은 이 영화를 추천한다.


난 강박이 있는 편이라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하는 성격이다. 이런 나도 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을 다 기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사람 이름 외워야지' 싶어 암기하는 경우도 몇 있긴 하겠지만 그건 내가 방금까지 하다 온 자격증 공부에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외워지는 경우가 대다수겠지? 한국인이라 그런가? 다른 나라의 감독 작품을 볼 일이 없으니 내 입장에서도 일본 감독들의 이름을 친근하지 못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오며 가며 일본의 제작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퀄리티가 있는 작품을 못 뽑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나라의 작품 만드는 질 자체도 요즘 영 시원찮은 부분이 있는 셈이다. 자, 이렇게 맞이한 2021년에서, 올해 한 명의 일본 감독이 세 편의 각본을 썼다.  올봄에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가 첫 번째고, 이 글에서 다룰 <드라이브 마이 카>가 두 번째이며 이제 개봉을 앞둔 <우연과 상상>이 세 번째다. <스파이의 아내>는 역사와 개인 사이의 딜레마를 아오이 유우의 연기력을 200% 뽐내는 디렉팅으로 마무리했다면 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간 내면이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게끔 도와준다. 이번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무려 봉준호 감독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난 이 일주일 남짓 남은 올해 개봉작 중 최고로 뽑고 있고 이는 나뿐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위대하고 젊은 아티스트가 우리를 데리고 세 시간짜리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한번 같이 출발해보자.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은


이 영화는 이해에 관한 영화다. 과연 나는 나를 이해하고 있을까? 아마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25살의 크리스마스를 맞은 지금 난 그제야 내가 외롭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해야 타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평생을 살면서도 자신을 알기 어렵다. 이렇게 되니 타인까지 안다고 하면 붙는 조건이 많아지기 때문에 점점 성공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쉽게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우리는 복잡한 겹겹이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슨 행동의 동기가 하나가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 영화는 이렇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존경심이나, 사랑, 애정, 증오, 질투와 같은 감정의 뒤죽박죽 속에서 어떤 게 인간에게 가까운지를 탐구한다. 이 탐구는 한 사람을 관통하는 상처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 내내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이 궁극적으로 묻는 것이 나의 어느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늘 어려운 이별


그리고, 또 이 작품은 이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별. 어렵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이별한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남겨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영화는 이렇게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겨져 있는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민은 크게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미처 떠나보내지 못했던 마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와 '이 상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 될 것 같다. 영화는 이 두가지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관객에게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아마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솔직함이라고도 답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두가지를 딱 던져준다고 해서 답이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그것도 '너만의 방식은 뭐야?'라는 식의 더 깊은 질문을 했다. 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 솔루션에 동의했다. (이걸 그냥 미리 툭 던진다고 해서 절대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떻게 그 결론까지로 향하는가가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긴긴밤과 낮의 연속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에게 한마디라도 더 하는 삶을 보내자. 이게 하마구치 류스케가 말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감독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키워드를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며 관객을 설득하니 관객이 두 번째 승객이 된 것처럼 마음의 진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냐 아저씨>를 꼭 볼 필요는 없지만


바로 안톤 체호프가 1889년 집필한 <바냐 아저씨>라는 희곡이다. 난 이 희곡에 대해 잘 몰랐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이해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근데 확실히 이 정보를 알고 나서 봤다면 작품의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바냐 아저씨>는 희곡이다. 주인공 바냐 아저씨가 나오고 그의 매형이 있다. 바냐 아저씨는 문화예술계와 학계에 입문하고 싶어 하는 그냥 소시민 1이다. 근데 막상 본인이 창작을 하라고 한다면 겁이 나서 두려운 바냐 아저씨. 그렇게 위대한 작품을 쓸 거라고 믿었던 바냐 아저씨는 매형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매형은 그냥 돈과 여자를 좋아하는 속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삶의 동기부여까지 잃은 그. 희망을 잃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 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바냐가 거의 딸처럼 키웠던 쏘냐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때 위로받으며 했던 대사는 이 것이다.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다. 


이 대사는 영화 전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그렇게 나름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도 후원했던 바냐 아저씨. 어떤 벽에 부딪혀 모든 걸 포기하고자 했다. 이때에 자기 자신을 내려놔 쏘냐에게 위로를 받았으니 희곡의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단연 소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모른다고 해서 대화와 교류라는 영화의 메세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나면 확실히 더 깊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로 돌아가서, 연출자 가후쿠는 이 연극의 캐스팅을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인부터 시작해서 일본인, 그리고 필리핀 사람까지 아시아에서 모인 사람들이 연극부의 일원이 된다. 심지어는 수어로 대화하는 사람도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소통을 키워드로 하는 연극을 만들며 딱딱한 시나리오 테스트에서 벗어나 배우와 배우가 자연인으로 만나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 영화 전부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 알게 되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연극 신이, 또 다키츠키와 가 후쿠가 술집에서 벌이는 대화가 이해가 쉬울 것이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러닝타임 세 시간


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봤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 봤을 때는 졸지 않았다. 깔끔하게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이버에서 이런저런 후기를 보니 내가 놓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 후반부의 엔딩 바로 직전 시퀀스에서 주는 감동과 내가 놓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해 오늘(12월 25일)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졸았다. 아침 9시의 조조영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사실 느릿느릿한 편이 맞다. 천천히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근데 그 감정선이 대놓고 분출하는 쪽은 아니다. 주인공 가후쿠는 내면을 드러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갖고 있는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그래서 마블 영화라던가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와 같이 로맨스 코미디물에 익숙한 관객들은 지루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첫 번째 관람 때 영화관을 나오며 느꼈던 기분이나, 두 번째 관람 때 초반부를 졸았음에도 영화에게 가졌던 감정은 그 어떤 작품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러닝타임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대사량이 많다는 게 영화 초보자분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자체의 플롯, <바냐 아저씨>라는 희곡, 또 가후쿠의 아내가 만든 스토리라인이 있다. 이 뿐인가? 차에서 대화하고, 술집에서 대화하고, 눈 밭에서 대화하고, 대화량이 쏟아지기 때문에 집중 잘 못하면 내용에 못 따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 이 작품 상영관이 정말 적다는 말이 있다. 걸려 있을 때 보시길!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운 신이 몇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이런 한국 배우들은 어디서 찾았대?


일단 난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 살고 (자칭) 씨네필로 살다 보면 한국인 배우들에 익숙해진다. '너 <낫아웃>의 정재광 배우 아냐?'같이 모를 법한 분들의 이름을 아냐고 물으면 당연히 모르겠지만 난 나름 잘 아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구교환, 이주영 배우 둘 다 <DP>나 <이태원 클라스> 이전에도 알았는걸? 암튼,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배우들을 잘 안다는 이점이 무색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국제적으로 호평받는 감독에 '박유림'이라는 아예 처음 들어보는 배우가 캐스팅됐다! 그리고 심지어 사랑스러운 연기 지망생 역을 꽤나 잘 소화했다! 그뿐일까? 이 사람은 수어로, 눈빛으로 대화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무리가 없다! 중간에 밖에서 어떤 인물과 대화하는 신 보면 '연기하는 연기'가 생동감이 있다. 이렇게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연출력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뽐내는 디렉팅을 통해 잔잔해 마음이 함께 이동하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미사키-가후쿠 두 배우의 연기 합도 괜찮지만 나머지 조연들도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몰입이 깨질 일은 없을 듯. 난 미사키 역을 맡은 배우가 기억에 남는다. 뚱한 표정으로 깊은 슬픔을 가진 사람은 연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해내는 것 보면 신기하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하지?


뛰어난 각본이 갖는 힘


 하마구치 류스케는 사람이 천천히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각본을 쓴 감독은 주인공의 잔잔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 일상을 자세하게 풀어줌으로써 인물들의 성향 내면에 있는 한 부분을 보여준다. 정공법이 아닌 비스듬히 스치는 방식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함께 따라가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쌓아올린 감정의 결을 하이라이트 신에서 해소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했다.  이런 각본의 힘으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상처와 치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이러저러해서 그렇게 됐어'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보법이 어떤지를 물어 알아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난 이걸 따라가다 보니 그런 걸 느꼈다. 후회와 미련으로 나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것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어쩌면 나의 마음 다른 부분을 쳐다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분들에게 100% 확신한다. 아마 많이 다를 것이다. 기존의 문법과는. 극복이라는 키워드를 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치유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것도 맞다. 그런데,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어떻게? 각본의 힘으로. 여러모로 고민한 티가 난 각본이 관객에게 그 힘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 이들에게 더도 없는 시네마 여행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올해의 영화다.



2021년 12월 25일에 쓴 것을 다시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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