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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Jul 16. 2022

서번트와 살리에리 그쯤에서 쓰는 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자취를 하게 된다면 꼭 강아지를 키워야겠다. 유튜브에서 귀여운 포켓몬 영상을 보고 든 생각이다. 태어나서 이만큼 귀여운 영상을 보고 마음이 녹아내렸던 적은 없다. 아마 처음이다. 출퇴근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나의 사회복무요원 생활. 이런 귀여운 영상을 보면 시간이 훅 지나간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켓몬과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천지차이다. 비단 어릴 때 봤던 <포켓몬스터>만 봐도 지우와 웅이는 온갖 고생을 해서 포켓몬을 기른다.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들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게 어려운데 실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생각 외로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또 나는 정에 약해서 언젠가 나를 떠나는 날이 오면 난 며칠을 힘들어하지 않을까?


이런 막연한 기대에는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질 거라는 행복 회로가 내재되어 있다. 이제까지 꿈꿔왔던 건 다 잘되곤 했다. 다 잘될 거야. 막연한 낙관 덕에 안 될 일도 잘 풀었다. 그래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일도 언젠간 성사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팽도리같은 친구가 나의 옆에서 언젠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것 같다. 그럼 또 적당히 행복하고 괴롭기도 하겠지.


적당히 행복하고 괴롭다. 


사실 적당히 괴롭고 행복한 삶이 진정으로 완성된 삶인지도 모르겠다. 저번 주에 책에서 읽은 내용 말이야.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에 대한 이론이 생각났다. 헬레니즘 시대의 어르신들은 행복이란 '적당한 선에서 오는 것'아러고 정의했다고 한다. 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앞으로 책을 더 찾아볼 거다. 암튼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의 나의 이해는 이 쪽에 더 가깝다. 최소한의 쾌락이라. 그냥 인간 구실만 하고 살면 되는 걸까. 근데 현실은 아니다. 난 뭔가 더 원하고 있다. '난 뛰어넘어 내 아버지'라는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난 내 뒤에 있는 아빠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원한다.


갑자기 그동안의 개고생이 주마등처럼 샥 스쳐간다. 뭔가 더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지? 내가 원했던 건 사실 단순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이었다. 병역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고. 사랑은 꿈꾸기엔 너무 밑바닥에 있었으며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다. 원하는 물건? 그건 추후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지'라는 말을 한 30번은 들었다. 그 말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번 되뇌어야만 했던 나의 교훈들. 단순히 그런 것을 얻어가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간단했다. 인정. 인정이었나? 아무튼 그랬던 것 같다. 타인에게서 받는 것이든, 나 자신에게서 받는 것이든.


그렇게 찾은 인정의 끝에 '천재'라는 말을 유달리 좋아했다. 억울한 일이 시작이 되어 결국 내가 만든 일로 귀결이 되는 이 문장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지'. 사실 자타가 공인하는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는 데에 누군가가 했던 이 말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면 여전히 나는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게 나의 쓸모를 확인받고 싶었던 나. 그럴 필요가 없는 행동으로 헛스윙을 크게 날리던 내가 너무나도 싫어 나다워지기로 결심했다. 착하게 살 줄 알았어. 그래서 나는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이 '천재'라는 말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감사하게도 날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근데 난 아직도 몇몇 나이 먹은 어르신들에게 개기던 과거가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날 미워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창피하지 않다. 어째. 이게 뭔가 쓰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의 숙명이라 생각해야지. 창작과 사회성 결여는 한 끗 차이 아닌가. '나 아니면 느그들은 어떻게 될 뻔했냐'라는 마음속의 당당함을 몇 개 추려내어 앞으로 전시한다. 내가 세상에게 똑똑이라고 인정받는 방법은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어려웠다. 그게 내 동기부여였으니까. 그렇게 내가 더 나아져서 미움받을 일도, 미워할 일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식이었으니까. 공부는 지지리도 안 했던 고1 때가 생각난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이렇게 말했다. '유동이는 어른이 되면 한 자리할 것 같은데?' 그때 공부 안 했어서 이 말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근데 사실 지금 나는 이 말을 누구보다 더 유념히 기억하고 있다. 


맞아. 나 열심히 했다고. 그래서 결론이 잘 났으면 좋겠다고. '한 자리 차지하겠다'라는 이 말은 무슨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잘 되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나는 확실히 천재가 맞아야 한다. 이 브런치 조회수 30만 넘었고. 나름 영화 일로 돈도 벌어봤고. 소속도 있다. 그런데, 사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 같다. 한국사도 잘 알아야 하고 토익도 잘 받아야 하며 뭐든 다 잘해야만 하는 나의 천재 컴플랙스는 어쩐지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작아지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에 더 시간을 이상하게 쓰는 것 같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 345일 이후에 소집해제하면 다 잘 풀릴까? 점점 이 막연한 낙관이 나의 살리에리 증후군에 의해 깨지고 있다는, 불안한 오해가 요즘 점점 들기 시작한다. 예전에 나보다 3살 많은 과의 선배라는 미친놈 하나가 자기소개서에 '장애 학생과 함께 조별과제를 한 적이 있다'라고 썼다고 한다. 우리 과에 장애인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싸 생활을 하던 나. 왠지 나를 장애 학생이라고 치환시켜놓은 듯한 기분에 찌질이같이 굴지 말라고 했던 지난날에 '더 욕을 할 걸 그랬나' 미련이 고개를 든다. 근데 어찌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움받아 더 이상한 인간이 되던 내가 '서번트 증후군'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 문제가 있으니, 내 장점이 그만큼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걔한테 욕 더 할걸. 나름 형이랍시고 참은 내가 미웠다. 그 찌질이 하나 때문에 이런 회의감이 드는 건 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난 어디 쪽에 가까울까? 서번트? 살리에리? 아니면 나는 그냥 나일까? 아니 사실 어느 쪽도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착하게 사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 그 말 덕에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운털 몇 개 박히는 건 예삿일이었다. 새롭게 살기 위해서 더 악랄해지고 더 뻔뻔해져 좋아하는 것들을 지켰던 나.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과 사람들을 지킬 줄 알아야 20대 초반의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근데, 이 뻔뻔함의 결론이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틀어질까 살짝 두렵다. 다 잘될 거야. 다 잘될 거야. 그렇지?

 

 사랑을 잘하고 싶다고 당돌하게 말했던 때가 생각난다. 사랑은 잘하고 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하고 있다. 그 외에는 대체로 까칠한 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미워하며 니체가 말했던 '위버맨쉬'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게 내가 원하고 바라왔던 방식이라고 믿으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사실 방법이라곤 그것밖에 없다. 


근데 믿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게, 지난날의 나를 죽이면서 또 현재의 나를 새롭게 살리는 일이라는 걸.

다 잘될 거다. 난 천재 맞다. 그리고 내가 천재여야 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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