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스포일러 없는 리뷰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두 갈래다. 컬러파트인 ‘핵분열’ 흑백파트인 ‘핵융합’이다. 컬러파트의 시점은 1954년이다. 원자력 협회 건물의 어느 방 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이유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때문이다. 오펜하이머가 국가기관에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접근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승인에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동안 어려운 선택지만 골라왔다. 세계 2차 대전을 끝내는 데에 두 번의 항복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치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었다. 나치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었고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한 오펜하이머. 전쟁영웅이라고 봐도 무방한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영화는 컬러 파트를 통해 ‘왜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위기가 들이닥쳤는가’를 보여준다.
핵융합 파트의 주인공은 루이스 스토로스다. 1959년. 루이스 스토로스는 상무부 장관 취임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루이스 스트로스. 형식상의 절차라는 보좌관의 말이 들리기는 해도 왠지 삶을 재판받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뭐 장관 뽑는 게 쉽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떨리는 스토로스에게 변수 하나가 생겼다. 익명의 과학자가 증언을 앞투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선택지만 골라온 삶이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스토로스의 청문회에서 그의 삶에 가려져있던 어떤 음모가 드러난다.
‘플롯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의 장기를 활용해 작가의 인장이 쾅 박힌 신작을 발표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플롯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자기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플롯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다루는 영화 용어다). 놀란이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은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전달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메멘토>는 흑백/컬러의 색채가 대비되는 장면들을 병치시켜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덩케르크>는 ‘전쟁 반대’라는 테마 아래 액션장면을 거진 다 지워버리는 승부수를 뒀다. 전쟁영화에서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살아 돌아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플롯으로 삼은 것이다. sf 영화인 <인터스텔라>에서 가족영화라는 테마와 블랙홀의 심연은 사실상 동격이다. 이 일종의 멀티버스 세팅은 ‘아버지가 딸을, 반대로 딸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형태가 우주의 모습과도 같다는 점이 유사점을 갖는다. 최근작 <테넷>은 초기작 <메멘토>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난해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점 찍고 전후반의 사건관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운명의 주연으로 어떻게 똑바로 서 걷는가’에 대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시간관계를 뒤틀어서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 플롯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고유의 연출법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우선 영화가 색채대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은 전작 <메멘토>가 연상된다. 이 <메멘토>에서 인물이 처절하게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본작이 이런 방식을 쓰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국의 한 행정부 장관이 되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다. 또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세계사에 기록될 만큼 큰 이벤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에 서툴러서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오펜하이머나 스트로스의 서사 하나만을 콕 찝어서 전개하기보다 대칭되는 두 사건을 보여줌으로서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 것이다.
이 영화의 컬러 부분인 ‘핵분열’ 파트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고 이는 영화에 작동하는 핵심 모티브다. 이 파트에서 다루는 가장 큰 줄기는 오펜하이머가 중심이 되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로브스를 위시한 군사전문가들과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이나 과학자들 앞에 서서 연설하는 장면은 '거대한 일은 이뤘지만 사소한 건 놓친' 한 인물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에게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명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TV 앞에서 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자료화면으로도 남아있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대사가 처음으로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원자폭탄을 발명해 전쟁을 멈춘 한 사람의 서사가 사랑이 가장 불타오를 때 시작된 것이다.
또한 영화가 이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20세기 당시 미국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 대한 암시로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이다.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매카시즘’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반공주의의 극단’이다. 한국전쟁 및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 공산주의에 대한 비호 여론이 들끓었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자국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하는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광풍을 정통으로 맞은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뽑았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이 소모적이지 않게 감독은 부지런할 정도로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게 한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핵분열 파트의 청문회 부분은 '너 공산주의자지?'를 정해놓고 조사위원들이 오펜하이머에게 질문한다.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유사한 측면에서 감독은 폭발 효과를 직접 구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테넷>에서 중고 비행기를 직접 구매해 실제로 부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인셉션>에선 촬영 도중에 직접 세트장을 뒤집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작중에서 제시되는 폭발을 직접 구현했다. 이 폭발은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적 기교를 부리기 위해 이런 연출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폭발은 오펜하이머의 서사를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연쇄작용이라는 키워드가 영화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아날로그 폭발로 구현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관객들이 어디서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일단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자 세계사에서도 족적을 남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단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똑같이 구현하는 것 자랑하려고 이 인물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영화에서 스트로스/오펜하이머의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 분기점을 보여주려고 감독이 어떤 선택을 뒀는지 주의깊게 본다면 흥미롭다. 그 외에도 어니스트 로렌스,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아이도어 아이작 라비 등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베니 샤프디가 맡은 에드워드 텔러는 배우 개성과 과학자의 캐릭터 세팅을 높게 흡착시킨 예시가 될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 역을 맡은 캐릭터는 놀랍다. 글쓴이는 솔직히 못 알아봤다.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야기의 반쪽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긴장감, 서스펜스를 혼자 이끌고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이 모든 이야기의 잔상이 밝혀질 때 목소리 톤에 변주를 둔 장면은 배우의 해석능력이 돋보인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가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