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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Aug 19. 2024

에이리언 질주하는 속도로 휘몰아치다

<에이리언 : 로물루스> 스포일러 없는 리뷰

 




이 영화의 주인공은 2142년에 살고 있는 20대 여자 레인 캐러딘(케일리 스페니)다. 어수선한 세상이다. 아니 더러운 세상이다. 웨이랜드 유타니라는 기업이 식민지로 삼은 지역에서 태어난 레인. 모든 사람에겐 강제노역이 주어졌다. 본인에게 할당된 강제노역의 시간을 가까스로 마무리 지은 레인. 다른 구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주하기 위해 행정업무를 보던  도중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린다. 기업이 강제노역 시간을 2배(12000시간에서 24000시간)로 늘렸다는 말이었다. 좌절하는 레인. 좌절하던 도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타일러에게 연락을 받는다. 타일러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떤 정거장에 잠입해 장비를 훔쳐 '이바가'라는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타일러의 계획이었다. 여기서 죽던지 아니면 정거장에서 죽는 것이다.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한 레인. 정거장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정거장에는 비밀이 있었다. 에이리언들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고개를 드는 크리쳐들. 과연 레인과 친구들은 위협을 이겨내 이바가로 갈 수 있을까?


클래식의 향기 그대로


이 <에이리언 : 로물루스>를 보고 느꼈던 가장 큰 특징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장르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우선 공간의 특성을 활용해서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강화시킨다. 이 영화는 공간을 우주로 제한하며 인물들의 동선을 제한한다. 몸에서 피부를 녹이는 산성 액체를 분비하는 크리쳐가 있는데 밖으로 나가면 우주 한가운데다. 이 크리쳐랑 우주선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끝내는 게 영화가 되면 그건 에이리언 시리즈가 아니다. 둘 중 하나가 녹다운이 될 때까지 추격전을 벌인다. 이 추격전에 윤활유가 되는 장치 두 개. 신체훼손이다. 에이리언이라는 외계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다.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신체훼손으로 사람에게 겁을 주면 무서움의 넓이를 쉽게 예상하지 못한다. 또 갇혀 있는 공간이라 ‘쟤한테 걸리면 정말 끔찍하겠어’라며 이야기의 처절함을 만드는데 최적화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나 <쏘우> 1편을 생각해 보면 이 서스펜스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가 장르의 관습을 잘 적용한 것이다.


두 번째 서스펜스 요소. 벽과 물이다. 끔찍하게 생긴 크리쳐가 우주선을 쿵쿵거리고 돌아다닌다. 또 게같은 크리쳐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인간들을 위협한다. 그럼 공간과 공간사이에서 도망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추격극이라는 관점에서도 벽이 중요하다. 벽과 관련한 상황이 만들어지며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영화 안에서 중요하게 작동한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벽의 성격. 기본적으로 어떤 존재의 이동을 제약한다. 크리쳐는 일반적인 사고방식 외의 것이 틈입한 존재다. 상상의 벽을 넘어 만들어진 존재가 괴물이다. 글쓴이는 이 크리쳐라는 것의 기본적인 속성과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등치 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것 중에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크리쳐들의 행보가 있다. 이 크리쳐가 어느 순간에 튀어나와서 캐릭터들의 얼굴을 덮칠지 모른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서스펜스가 영화를 이끈다. 크리쳐의 모티브를 영화 안에 그대로 투영시킨 것이다. 이 문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영화는 물의 이미지도 차용한다. 원래 이런 영화(들)에서 물을 다룬다고 하면 생명의 탄생을 다룬다. 이 모티브를 영화가 이상하게 뒤틀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이런 부분이 영화가 신선하다고 느낄만한 부분이다.


또 이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 에이리언의 생김새다. <더 씽>이라는 영화가 있다. 1982년 영화다. <에이리언> 1편과 함께 크리쳐물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이다. 이 글을 쓰다 글쓴이는 느닷없이 ‘the thing(1982) creature’라고 구글에 검색한다.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등장한다. 이 비주얼은 지금 봐도 끔찍한데 1980년대 초라는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혁명적이었다. 글쓴이는 이 <에이리언 : 로물루스> 후반부에 등장하는 크리쳐가 <더 씽>에서 따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리쳐물을 왜 보러 갈까? 그거야 끔찍한 크리쳐가 만드는 서스펜스를 체감하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그 기획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한 셈이다. 물론 기존 ‘에이리언’ 시리즈의 크리쳐들과 겹쳐지는 장면도 일부 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은 시리즈의 시그니처라고 봐도 무방하면서 전작들 중 하나가 생각난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크리쳐들을 끔찍하게 묘사하는데, 그냥 단순히 예전 것만 쓱 가져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을 어떻게 또 무슨 맥락으로 보여줬는지가 중요할 텐데, 이 영화가 어느 정도는 철학적/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선택과 집중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장르의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이 만든 각본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우는 영화다. 그럼 당연히 추격극이 전제되어야 한다. 가령 <탈주> 같은 영화들을 생각해 본다. <탈주>의 추격극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이유. 추격하는 과정은 단순한데 그 외적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고, 그 둘은 사실 큰 관련이 없다. 자유의지를 두고 싸우는 인물의 모습과 추격극이 크게 관련이 없으니 총알 안 맞는 인물의 모습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에이리언 : 로물루스>는 레인의 동선과 한 캐릭터의 활용으로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어느 정도 진행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 연출이 정말 중요했다. 영화가 크리쳐를 피하던지 / 죽이던지 둘 중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다는 측면에서 교통정리를 잘한 셈이다. 후반 하이라이트 장면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는데, 그전에 불필요한 것들을 말끔하게 정리했으니 하고 싶은 것에 큰 효과를 줄 수 있었다.


또 이 영화가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렸다는 점은 인물 수에서 온다. 인물 수가 적은 것은 영화가 영리하게 플롯을 끌고 가기 위해 고른 선택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다루고 문제들에 비해 인물은 6명밖에 안 나온다. 막 세계의 누가 어떻게 되고 우주의 운명이 갈리고 이랬다면 영화가 정말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보여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반대로 캐릭터 간의 관계를 통해 후술 할 윤리적인 문제를 조명한다. 또, 적은 인원과 넓은 공간이라는 인원/공간 설정을 통해 인간에 의한 변수를 차단한다. 감독의 전작 <맨 인 더 다크>에서 소수정예로 나와 강력한 서스펜스를 보여줬던 것을 이 영화에서 그대로 승계했는데 자기가 잘하는 걸 선택하고 집중한 결과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사운드를 활용한 방식도 탁월하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 최고의 강점이다. 크리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찌지 직하며 몸을 움직이는 듯한 소리, 공간적 배경이 우주인 탓에 일어나는 진공, 앤디의 목소리 톤을 활용한 연출까지 영화가 사운드를 통해 잡을 수 있는 장르적인 장점은 싹싹 긁어모았다. 글쓴이는 앤디가 "Run!"이라고 말하는 장면과 후반부 하이라이트 장면의 사운드 연출에서 보여주는 밀도에서 놀라웠다. 서울권의 관객들은 돌비관에서 봐도 충분할 듯하다.


트롤리 딜레마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두 문제를 한 방에 축약하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앤디다. 앤디가 내포한 첫 번째 딜레마. 앤디를 우리와 비슷한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부분이다. 앤디는 합성인간이다. 합성인간이라 함은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합성인간은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유대감을 이룬다.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에 개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두 설정은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개입할 수 있으면서 사람과 유대감을 쌓는 존재는 세상에 인간 말고 존재하기가 어렵다. 반려동물들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 영화와 유사한 사건을 그대로 겪는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 설정을 영화가 처절하게 활용하는데, 이런 앤디가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행동들이 장르적인 재미도 챙기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윤리적인 고민을 수반시킨다. 과연 우리는 이런 존재를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 두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하더라도 존중해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지 않을까? 이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앞에 두고 질주하는 영화이니 만큼 윤리적인 화두도 영화 전면에 배치한다.


두 번째 문제는 공리주의다. 제레미 벤담을 위시로 한 공리주의를 다룬 철학자들은 많았으니 이미 많은 관객들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룬 특별한 조건이 있다. 이 공리주의에 대한 부분이 앤디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서술했듯 앤디는 인간이 아니다. 앤디 같은 합성인간이야 어디 가서 구매해도 대체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주인공 레인은 이것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동생 같은 앤디를 지키기 위해 인물이 어떤 행동을 고수한다. 이 레인의 행동은 레인 외의 인물들과 전적으로 대치되며, 특히 어떤 캐릭터의 히스토리와 대비되며 ‘과연 객체를 무시하고 다수의 이익부터 따지는 것이 옳은가?’를 질문한다. 호러영화에서 이런 식의 딜레마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각본이 영리해서 캐릭터의 특성을 중심으로 잘 구현했다. 글쓴이는 앤디가 프로그래밍된 존재라는 점이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인 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쓱 지나가는 설정이지만 감정이입의 깊이를 더한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복제인간 유형


이 영화의 단점으로 뽑을 수 있는 건 캐릭터 설정이다. 글쓴이는 크게 두 인물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일단 비요른이다. 비요른은 위에서도 적은 영화가 다룬 윤리적인 문제에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이게 공포영화의 1차원적인 클리셰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왜 이렇게 설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인물이 아예 더 막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인물이 겪은 트라우마에 비해 세상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이 적당히 찌질하다. 이 사람은 이렇게 1차원적인 캐릭터로 남지 않아도 됐다. 더 강력한 찌질함으로 무장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캐릭터였어도 이야기에 큰 무리가 없는데 이 위험도에 비해 인물이 납작하니 이야기의 굴곡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예 더 찌질했으면 이야기의 마무리가 더 강렬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레인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레인이 갖고 있는 성격 특성이 있다. 승무원 구성원들을 아낀다는 점과 앤디에 대한 애정 두 가지다. 후자는 잘 알겠다. 초반에 등장하는 레인의 설정 때문에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자는 영화가 굉장히 편의적으로 다룬다. 감정적인 몰입도를 영화가 성실하게 챙기지 못한 것이다. 레인을 지지하지만 옅게 지지하는 캐릭터 케이가 그렇다. 이 케이와 레인은 극 중에서 친하다는 느낌이 없는데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방식은 상호 간에 깊어 보인다. 영화 보기의 관습에 힘입어 ‘아 얘들 친하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냥 납득하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없어 인장이 옅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장르영화로서 훌륭해


이 <에이리언 : 로물루스>를 총평하는 ‘재미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누가 글쓴이에게 ‘야 지금 걸려있는 것 중에 뭐가 제일 재밌어?’라고 묻는다면 ‘이거!’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했던 <빅토리> 감정적인 중심만 중요한 <행복의 나라> 평범한 게 장점이자 단점인 <트위스터스>에 비해 장르로서 / 감독 개인으로서의 향이 강한 영화가 이 작품이다. 대신 영화 안의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8월 14일 개봉작 빅 4에 비해서도 몰개성한 느낌이 있고, 잔인한 수위라는 점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이런 장르물에 목말라 시원한 사이다 한 방을 기다려온 관객들 아닌가? 굶주린 관객들에게 시원한 마실거리가 될 <에이리언 : 로물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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