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셨던 음료 사진 모음은 가장 아래에
세계여행을 하면서 아련한 눈빛을 자주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여행하는 동안에는 용돈 벌이를 하고 있다는 것조차 무색할 정도로 수입보다 지출 속도가 몇 배는 빠르기 때문에 아낄 수 있는 항목에서 부단히 아끼는 게 필수였다. 교통비와 투어 비용은 줄일 수 없으니 남은 건 숙박비와 식비뿐.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모든 국가 도시에서 호스텔을 선택했고 12인실, 혼성 도미토리, 숙소 컨디션 등 빈대와 접근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가격에 따라 선택했다. 평소에 잔병치레도 없던 강철 면역력의 소유자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감기를 반년 동안 세 번이나 걸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숙박보다 더 처절하게 아낀 건 식비였다. 빵과 과자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번 세계여행은 훨씬 더 짧은 기간으로 끝이 났을 거다. 목표했던 나라들을 반도 채 돌지 못했을 거다. 도시를 반으로 줄였거나.
지금에 와서야 뿌듯하지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는 일이었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원하는 대로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정서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체험한 시간들이었다. 가게 유리창에서 음식들을 '눈으로만 보시오'라고 안내문이 붙어 있는 작품처럼 대하는 건 분명 서글픈 일이었다.
여행 코스상 유독 물가 비싼 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었는데 그걸 어떻게든 가능하게 하려고 억지로 나를 맞추다 보니 벌어진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머물고 싶은 욕심을 이루는 대신에 지갑을 더 바짝 묶어야 했다. 물가가 저렴했던 태국과 가족들과 재회했던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레스토랑에 간 횟수가 한 손가락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 뉴욕에서 50일을 머물렀는데 매일 아침은 시리얼을 한 박스 사서 우유에 말아먹었고 점심은
베이글과 같은 빵이나 조각 피자, 세븐일레븐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사치를 부렸다면 쉐이크쉑과 칙필레 버거 정도? 가장 아꼈을 때는 수프랑 먹으라고 파는 정사각형 성인 남자 손바닥만 한 옥수수빵을 나는 식사대용으로 사서 먹었다. 마트 한편에 사람들이 마트에서 파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다섯 줄 정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구석에서 혼자 빵가루가 후두두둑 떨어질 정도로 퍼석한 옥수수빵을 우걱우걱 먹었다. 뉴욕 마지막 날 생각해 보니 팁을 어떻게 내는 건지 미리 찾아본 게 무색하게 50일 동안 팁을 한 번도 낼 일이 없었다. 레스토랑 한 번을 가지 않다는 거다. 뉴욕에서 자리 잡는 것도 쉽지 않은 공연을 보면서 먹는 레스토랑과 유명한 스테이크 · 피자 가게가 궁금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가 갈 수 있는 나라가 혹은 도시가 한 곳씩 줄어든다 생각하면 꾹 참게 됐다.
미국 이후에 갔는데도 당황스러웠던 지구 최강(아니 우주 최강일지도) 물가 스위스에서는 눈을 질끈 감고 마트만 이용했다. 딱 한 번만 COOP마트에 파는 파스타 샐러드와 닭고기 윙을 먹었고 그 외에는 아예 과자와 초콜릿만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세계여행이 끝나고 입맛이 완전 단맛추구형으로 바뀌었는데 아마 스위스가 가장 결정적인 원인 제공 국가인 것 같다.
그리스 프랑스 터키 등 그 외 나라에서도 빵과 과자로 배고픔을 해결했다.
음식 앞에서 추위에 떠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순간이 잦았던 만큼 음식은 애증하는 무엇이었지만, 그럼에도 반년동안 '그냥 집에 갈래' 무너지지 않고 빵과 과자를 특별한 음식 경험이라 생각하고 찾아 먹을 수 있었던 건 스타벅스라는 사치 덕분이다.
처음부터 사치였던 건 아니다. 호주에서 태국을 거쳐 연말과 새해를 보내기 위해 잠깐 갔던 유럽 대륙에서부터 스타벅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가끔 싼 호스텔을 찾아가면 와이파이가 있으나마나인 경우가 있다. 와이파이가 있는데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는 직접 겪으면 분통 터지는 환경에 노트북을 들고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다. 음료 하나 시켜놓고 오전 9시부터 노트북 키보드를 타닥거렸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 서양인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다음 달 잔고의 안녕을 위한 작업을 했다. 다른 카페에서는 노트북 하기 미안한 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기에 스타벅스를 이후 나라에서도 곧잘 방문했다. 스타벅스는 숙소에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을 때마다 방문하는 작업실이 됐다.
작업실이 다른 용도까지 갖게 된 건 소비를 통제한 지 1분기가 된 시점부터였다. 처음에는 한국에서도 항상 마시던 그린티라떼 쿨라임피지오를 고집하다가 점차 한국에서는 마실 수 없는 메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부터 주문한 음료의 폭이 넓어졌다. 스타벅스의 본고장인 미국은 커스텀이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이 만드는 수준일 정도로 옵션이 다양하다. 우유 종류를 바꾸거나 탄산을 엑스트라로 선택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휘핑크림 종류가 다섯 개 이상이었고 뿌리는 시럽과 파우더는 그보다도 다양했다. 여기에 토핑과 드리즐까지 여러 개를 쌓고 조합해 주문할 수 있으니 직원들의 정신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예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에서 적당히 옵션을 선택하며 스타벅스 본고장을 누볐다. 미국 스타벅스에서 가장 즐겨 마셨던 건 'Paradise Drink Starbucks Refresher'와 'Mango Dragonfruit Starbucks Refreshers' 두 가지다. Paradise Drink Starbucks Refresher는 한국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파인애플 리프레셔다. 한국에서도 리프레셔를 워낙 즐겼기 때문에 시도했는데 한입 마시자마자 반했다. 파인애플 토핑이 가득 들어간 가벼운 재질의 음료는 언제 마셔도 적당하다. 위가 무거워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돈 아까운 허전한 맛도 아닌.
Mango Dragonfruit Starbucks Refreshers는 한국에도 있지만 미국에서 꼭 한번 마셔보고 싶었던 메뉴다. 미국의 Mango Dragonfruit Starbucks Refreshers는 용과를 추가하는 커스터마이징 옵션이 있다는 사실을 유튜브 영상을 통해 접했기 때문이다. 미국 Mango Dragonfruit Starbucks Refreshers가 훨씬 진한 작약꽃 색으로 보이는 건 이 커스터마이징을 현지인들이 곧잘 이용하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곧잘 경험했는데 스타벅스의 나라에서 커스터마이징 문화까지 경험하니 이 또한 이색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시간대에 뉴욕 직장인들 사이에서 옵션 추가한 음료를 주문하는 건 긴장되면서도 도파민이 솟는 일이었다.
미국과 동일한 시스템이라 동일한 계정으로 사이렌오더 주문이 가능했던 캐나다 이후에는 스타벅스도 가뭄에 콩 나듯이 갔다. 더 아껴보자는 생각으로 현지 유심 데이터를 활용해 핫스팟 기능으로 노트북을 썼기 때문이다. 식사대용으로 유럽에서 한창 인기였던 버블티를 마시면서 멀리하게 된 것도 있다. 뉴욕에서 파인애플 토핑 세 스쿱 추가해서 먹었던 날이 그리웠지만 한 겨울날의 꿈이었음을 차츰 인정해 갔다. 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그렇게 터키에서 딱 한 번 마신 'Orange Mango Refresher'를 마지막으로 스타벅스와 함께하는 시간은 끝이 났다(요르단 암만에서도 스타벅스를 발견했지만, 잔고에 빨간불이 들어와 지인 선물로 줄 시티컵과 점심으로 먹을 트리플 치즈 샌드위치만 샀다).
세계여행이 끝난 지 1분기가 다 차고 알아차렸다.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사 먹는 게 긴 시간 동안 혼자 몸 뉘일 곳을 찾고, 변수에 대처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은연중에 쌓였던 외로움과 서러움에 토닥토닥 셀프 위로하는 행위였더라.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우는 주인공에게 주먹밥을 주면서 응원과 위로를 건네었던 하쿠처럼. 한국에서도 곧잘 찾았고 어느 나라나 크게 적응할 게 없는 음료를 붙잡고 기댔던 것 같다. 그럴 수 있어. 아주 낯설기만 한 건 아니니까 잘 해낼 수 있어.
여행하면서 후회를 자주 했다.
'더 절실하게 돈 모을 걸'
'영어 공부 좀 할 걸'
'미리 찾아볼 걸'
'가족들한테 더 잘할 걸'
'아 왜 그걸 못 봤지?'
어차피 혼자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좋게 생각하고 넘기거나, 주저앉을 시간에 해결할 방도를 찾는 게 지름길이라는 걸 체득한 건 세계여행 후반부에 다 달았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정착하고 있는 나라조차 없는 떠돌이 여행자에게 이런저런 나름의 사연 있는 울적한 기분들이 찾아올 때 익숙한 구석이 있는 스타벅스 음료로 기분을 희석시켰다. 그러면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15개국 52개 도시를 여행했다. 소름 돋고 감동적이었던, 신비롭고 이상했던 풍경들을 참 많이 봤다.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됐다. 미래도 새롭게 설계했다. 그렇게 한 아름 안고 넉넉한 마음으로 익숙함 100으로 이루어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커스터마이징이 불가한 'Mango Dragonfruit Starbucks Refreshers'의 진달래색 음료를 보다가 별알간 코가 시큰거릴 때, 그때의 내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고 또 이해한다. 세계를 여행한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바라고 또 준비했지만 결국엔 처음이었으니까. 혼자 타지에서 생활과 여행 어느 중간쯤을 살아본 거니까. 처음은 다 그래.
그렇게 스타벅스 음료는 소울 드링크가 됐다. 마실 때면 몇 초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얻기까지 방황했던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 15개국 52개 도시를 여행한 윤슬의 세계여행 총 결산은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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