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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모험이 주는 행복이 있다

by 뚜벅이는 윤슬

이렇게 아는 거 없이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 출국 전까지 미리 처리해야할 업무들이 많아서 하코네 여행까지는 신경쓰지 못했다. mbti P와 J의 논쟁이 있기 전부터 현지에서 변수가 생기더라도 일단 밑그림은 그려놓고 떠나야 마음 편한 계획형 여행자는 하코네를 이미 가 본 적이 있는 일행이 있음에도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도쿄 출장 전에 며칠 일찍 가서 도쿄 시내 자유여행도 하고, 근교 하코네에서도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도쿄는 매번 여행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좀처럼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약 2년을 벼르고 있다가 드디어 출장 건이 생기면서 반강제로 여행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자유여행이 가능한 며칠 중 1박 2일은 지인들과 함께 도쿄 근교의 소도시 하코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각자 도쿄 현지에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하코네 여행의 시작인 하코네유모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하코네유모토역을 가게 됐다. 오랜만에 출장이 아닌, 여행으로 이동을 한다는 사실에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져 하늘로 떠오를 것 같았다. 하나하나 미션에 도전하듯 부딪히면서 해결하는, 그러나 그 미션을 무조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어느 정도 통제권 안에 들어있는 수준인 적당한 모험. 여행을 지속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한 모든 것이 다 현장에서 그 효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여행은 특히 그렇다.

숙소 도보 15분 거리에 있었던 신주쿠역은 도쿄여행 초심자는 누구나 한 번쯤 헤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구도 역사 내의 길도 여러 개다. 구글맵에 의존하더라도 구글맵이 말하는 역 출구를 찾아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서쪽 출구로 들어가라는데 서쪽 출구가 나오기 전부터 5-1번 출구 이런 식으로 여러 개의 출구가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지도가 말하는 곳에는 서쪽 출구가 없는, 그런 알다가도 모르겠는 역이 신주쿠역이다.

이전 도쿄 여행에서 신주쿠역을 어떻게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체득된 감이 있는지 혹은 전날 하코네 가는 방법을 검색해서 누군가 쓴 블로그 후기를 보고 잔 덕분인지 출구는 지도와 다른 출구로 들어갔어도 한 번에 하코네 패스권을 교환하는 서비스 센터까지 찾아갔다. 그렇게 파란 간판의 서비스 센터에 들어가 키오스크에서 하코네 패스권 실물 티켓을 받았다(하코네 패스는 한국 투어 플랫폼에서 사전에 사면 현지에서 바우처 번호를 입력하고 쉽게 실물 티켓을 받을 수 있다). 흰색 패스권이 키오스크에서 지이잉, 나오는 걸 받아들고 뿌듯한 마음에 서비스 센터 앞에서 티켓 인증샷을 찍었다.

하코네유모토역까지 가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헤맸던 건 패스권 혜택을 적용한 가격으로 기차 티켓을 예매하는 미션이었다. 뒤에는 다른 여행객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블로그에서 하라던대로 버튼을 눌러도 할인된 가격이 등장하지 않는 거다. 키오스크는 언제나 뒤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때 긴장감을 부른다. 단번에 후다닥 해야할 것 같은데 어라? 예상치 못하게 결제를 할 수 없을 때 뒷사람들의 실제 감정과는 무관하게 초조해진다. 결국 발매기 앞에서 몇차례 처음부터 다시 해보다가 볼 일을 다 본 척 차례를 양보하고 다시 줄을 서 이번에는 내 감대로 버튼을 눌러 할인가인 1,200엔에 기차표를 구매했다. 일본 지하철 기차 등의 열차표는 언제나 두께감 있는 빠빳한 티켓과 영수증이 나오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잘 구겨지지 않는 특유의 질감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기차를 잘못 타는 일을 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에 플랫폼으로 올라가기 전에 역무원께 이 번호 플랫폼으로 가는 게 맞나요, 여쭤보고 확신을 더한 뒤 플랫폼으로 향했다. 출장으로 도시를 이동할 때 신칸센을 탄 적이 있지만 그 때는 현지 인솔자를 따라 가기만 했던 거라 설레는 마음은 없었는데, 스스로 찾아와 본 기차는 거의 영화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행 기차다. 도쿄에서 기차라니. 기차라니! 하코네유모토역까지도 잘 가보자며 플랫폼에 있는 자판기에서 손 크기만한 작은 생수를 샀다. 일본에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미니 사이즈의 음료들을 많이 판매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귀엽고 갖고 다니기에도 적당하다.

자판기 맞은편에 있는 도시락 가판대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타야 할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서 문 앞에 줄을 섰다. 내가 타야할 칸을 어떻게 확인하는 건지 플랫폼 바닥과 열차를 봐도 모르겠어서 잘못된 위치에 섰다가 후다닥 자리를 옮기는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를 만든 다음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코네유모토역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는 오전에 숙소 근처에서 산 소금빵과 편의점에서 샀던 밀크티를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대뜸 한 중국인이 친구와 자리가 떨어져서 혹시 자리를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혼자 비행기든 기차든 타면 꼭 자리를 바꿔줄 수 있냐고 요청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이 아이러니한 법칙. 자신의 자리가 혼자만 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리라고 하도 강조를 하길래 바꿔드렸다. 실제로 좋은 자리이긴 했다. 해당 칸 맨 앞자리 좌석이었는데 정말 유일하게 한 자리만 있는 일인석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그분들도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윈윈이었던 자리 교체는 혼자 여행하면서 처음이었다.

유명한 빵집에서 산 소금빵을 돌돌 결대로 뜯어 먹으면서, 그리고 한국에서 자주 그리워했던 편의점 밀크티를 호로록 마시면서 도착한 하코네유모토역.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 역을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에 뒤에서 워, 놀래킨 일행들 덕분에 캐리어를 다시 끙차끙차 들고 계단을 올라갈 일은 없었다.


마지막 일행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당일에 바로 하코네까지 온다고 해서 그 전까지 먼저 하코네유모토역 근처 여행지들을 여행하기로 했다. 역에 캐리어를 보관하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정처없이 역 근처 거리를 걸었다. 그러던 중 네비게이션 역할을 자처한 언니 덕분에 하코네의 숨은 여행지를 발견했다. 언니는 비계획형 여행자인데 현장에서의 빠른 판단력이 좋아서 이 정도의 똑부러진 성격이라면 계획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언니가 이끈 곳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신비로운 짙은 초록색이 가득한 소운지 사찰(Soun-ji)이었다. 이끼과 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 이런 곳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코네에 이런 곳이 있다니. 여러 나무들이 마당에 심어져 있고 사찰 왼쪽으로는 공동묘지가 그 뒤로는 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의 긴 계단이 있는 사찰은 작지만 곳곳에 길이 있었다. 마당에 심어져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궁금했는데 자두나무였나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자두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사찰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햇살이 틈새로 들어와 풍경에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마음에 들었다. 명암이 선명한 결과물들을 한창 좋아했기에 소운지 사찰은 최적의 출사지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후지산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곳 외에 아는 바가 없었던 하코네에 빠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도쿄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나 상반된 풍경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쿄여행까지 더 사랑하게 됐다.


하이라이트는 대형 온천 리조트 뒤에 있는 폭포였다. 연분홍색 꽃잎이 동동 띄워져 있는 폭포는 연못과 잘 어울리는 크기의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였는데 소도시와 어울리는 폭포라고 생각했다. 꽃잎보다는 채도가 높은 분홍색 유카타를 입고 폭포를 보는 분이 풍경과 잘 어울렸다.

폭포 한쪽에 족욕 체험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언니 오빠가 먼저 들어갔더니 한 번 들어가보라고 해서 거절하다가 들어갔는데 아, 괜히 들어갔다. 북극 빙하 위를 걷던 중에 빙하가 깨져서 빠진 줄 알았다. 다리에서 쥐가 날 것 같을 정도로 차가웠다. 얼음장이라는 표현보다 더 극적인 시려움이었다. 그 뒤로 폭포가 매섭게 보였고 연청색의 청바지 밑단이 젖어 색깔이 진해진 모양새로 폭포를 떠났다.


폭포에 발을 담구면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던 걸까. 굶어 죽은 채로 일행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점심 식사를 해야했다. 야채와 닭고기가 적당히 밥 한 공기의 반찬으로 곁들여 먹을 정도의 양만큼 들어있는 수프카레로 결정! 하코네유모토역에서 도보 10분 거리 건물 지하에 있는 카레 전문점이였는데, 하코네 여행 경험이 있는 오빠가 그때도 여기에서 먹었다며 방금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하코네 가게들을 둘러보다가 다 비싸서 그나마 저렴한 곳으로 온 건데 그때의 오빠도 가격을 고려했던 게 아닐까?

다 먹고 계산하려고 일어났는데 그제서야 현금만 가능하다는 안내 문구를 발견했다. 아뿔싸. 나 현금 캐리어 보관할 때 다 썼는데. "카드는 안 되는 거죠?" 한 번 물어보고 곤란한 표정으로 언니한테 돈을 빌렸다. 일본은 아직 현금이 대세구나. 인천공항에서 환전을 비상금 정도로만 한 과거의 내가 어이없어졌다. 언니한테 여윳돈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 서빙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나와야 할 뻔했다.

당황스런 에피소드는 하코네역 근처 세븐일레븐 내 ATM기에서 수수료를 내고 돈을 인출해 갚은 것을 일단락됐다. 한국에서 했으면 수수료 없는 건데 젠장. 아까워서 사진이라도 찍었다. 블로그에 하코네 ATM 위치 키워드로 후기라도 써서 콘텐츠로라도 만들겠다는 크리에이터의 광기로.


카메라에 찍은 사진 컷 수가 400장을 넘겼을 때쯤, 마지막 일행인 언니가 한국에서 출발해 하코네까지 강행군을 무사히 견뎌 하코네유모토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24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곳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완전체가 되자마자 바로 사전에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보통 하코네유모토역 인근의 온천 숙소를 많이 잡지만, 가격 이슈로 일보 후퇴. 산악열차를 타고 고우라역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숙소가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 신의 한 수였다. 산을 향해 길게 뻗은 아스팔드 도로. 양옆에 있는 작은 집과 가게들. 피자를 함께 파는 짙은 붉은 색의 펍과 창문으로 보이는 내부. 그 안에 앉아 있던 약 여섯 명의 서양인들. 그나마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문 닫은 공원뿐인 조용한 주거 지역의 풍경이 사랑스러웠다. 그 와중에 편의점은 하나 있어 일본 편의점 음식으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던 최소한의 조건. 단순함이 주는 행복이 있다.

성격도 급한 편이고 계획적인 성향이라 해야할 일이 생기면 빨리 끝맺으려는 강박이 있다. 그 근원에는 삶에 있어 자유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있다. 스스로 주도하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열심히 하는 일상으로 하루 하루를 채우고 싶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너그럽지 않다. 대충이라도 행복하고 싶은데 그 난이도가 최최최최상이다. 그 스트레스를 온갖 것에 기대면서 푼다. 야구에 좋아하는 배우에 아이돌 그룹에 조명에 향에 음악과 이어폰에 미술 작품에 상황에 맞게 틈틈히 의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로감과 불만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지만, '해.. 해내야지!' 억지로라도 질질 끌고 간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게 열정이라면 열정일 거다. 바쁘게 사는 게 의미있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들을 탁, 놓았을 때의 쾌감이 있다. 산 정상 위에서 맞는 바람처럼. 살얼음 맥주의 첫입처럼. 높은 곳에서 무서워하다가 떨어져 기어코 바닥에 다시 발을 딛는 액티비티와 롤러코스터를 탄 직후의 기분과 비슷한 가벼운 행복을 하코네의 작은 마을에 있는 동안 느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느낌을 안온한 거라고 하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하나하나 미션에 도전하듯 부딪히면서 해결하는, 그러나 그 미션을 무조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어느 정도 통제권 안에 들어있는 수준인 적당한 모험. 하코네에서의 첫 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계속해서 미션이 있었지만 당장 그 일에만 잠깐 집중하면 이내 특별한 추억과 감정을 얻게 된다는 보장이 있었던, 그래서 마음에 내내 안정감이 있었던 편안한 여행. 하코네에서 여행을 앞으로도 지속해야할 이유를 다시금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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