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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담지 못한 어떤 사랑

by 뚜벅이는 윤슬

점심시간에 딱 맞춰 식당을 찾아간 바람에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함께 있었던 친구와 나중에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넌 사랑에 관심이 없어서 사랑을 주제로 쓰진 못하겠다"

내가 사랑에 관심이 없어 보이나? 그러기엔 거의 만물을 사랑하는 수준인데.

"음? 아냐. 나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 하루가 모자라는데? 아이돌도 사랑해. 배우도 사랑해. 캐릭터도 사랑해. 야구도 사랑해. 여행도 사랑해. 가족도 사랑해. 책도 사랑해. 밀크티도 사랑해 빵도 사랑해..."

"아, 진짜 그것도 사랑이구나"

친구는 남들 다 보는 연애 프로그램도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도 소설도 안 보는 내 모습을 수년간 봐 온 사람이라 '아, 내 친구는 사랑에 관심이 없군' 생각할 법하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사랑으로만 채우고 있다.

야구를 사랑해서 직관을 갈 때마다 한 장에 4천 원짜리 포토카드를 세 장씩 뽑고 만 원짜리 선수별 키링을 산다. 학창 시절 때부터 좋아하는 아이돌이 없었던 적이 없다. 자칭 공백기 없는 아이돌 팬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에 팝송도 좋아해 내한 콘서트에 아낌없이 통장을 열어 십만 원 이십만 원을 지출하고, 좋아하는 배우가 있어 영화나 드라마 신작을 기다리며 설레는 일이 다반사다. 영화 무대인사도 곧잘 챙길 정도다. 여행을 보통 이상으로 좋아해 덕업일치로 여행사에 취직하고 여행 크리에이터 그리고 여행 에디터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500만 원이 넘는 카메라를 사려고 돈을 모으고 있고 사진 클래스나 소모임에 적극적으로 시간을 쓴다. 영화를 좋아해서 매일 한 편씩 보고 자는 방구석 영화제 기간이 있고, 영화제를 여러 곳 가는 게 내년의 목표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어 랜덤 피규어를 사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독서와 전시 관람을 좋아해서 '이런 곳에는 돈 아끼는 거 아니야' 합리화를 하는 게 습관에 가깝다.

관심사가 이렇게 많아서 어디 돈을 모으겠나, 한 가지에 진득하게 집중하겠나, 가끔 스스로에게 쯧쯧 혀를 찬다. 실행하는 시간도 사랑하는지 참 아낌없이 다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랑이 과포화상태다.


내가 로맨스 영화 드라마 혹은 이를 주제로 한 예능을 안 보는 이유는 남녀 간의 사랑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사랑마저 챙길 여유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속 그릇의 크기가 아직 모든 사랑을 담기에는 한참 작아서 우선순위를 꼽을 수밖에 없는데 후순위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살다 보면 또 그 순서가 바뀔 수도 있겠지.

2025년 한 해 일기는 구글 문서에 썼다. 실물 일기장이 아닌, 구글 문서에 일기를 썼을 때의 장점을 며칠 전에 발견했다. 파일을 통째로 챗GPT에 넣고 가장 많이 쓴 단어와 감정의 흐름을 분석해 달라고 명령어를 넣으면 구체적으로 일 년을 회고해 준다. 월별로 긍정과 부정 표현 비중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알려주니 분석한 자료만 보고 언제 가장 고민이 많았고 내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덕분에 2025년 회고 속도가 다른 해보다 빨랐는데 그중 눈에 띄는 건 올 한 해 동안 성장에 대한 갈증이 대단했다는 점이다. 일기장에 1월부터 12월까지 잘하고 싶은 마음을 많이도 표현했다. 사진도 잘 찍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프리랜서로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거나 취직을 하면서 프리랜서를 병행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인지 고민하는 등을 매월 언급했다. 새로 배우고 싶은 것들도 참 많았다. 실천에 옮긴 건 몇 개 되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해보고 싶은 게 생겨나는 무한증식의 한 해였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찾느라 남녀 간의 사랑에 과몰입하거나 특정 출연진이나 등장인물을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내는 것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잘해보자는 결심은 막상 책상에 앉으면 자주 좌절됐다. 오래 앉아서 길게 몰입하는 끈기에 취약해 스트레스를 자주 받았고 그럴 때마다 좋아하는 배우가 '이게 말이 되는 집중력인가' 싶을 정도로 인물에 빠져 연기를 연습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팬으로서 '이 정도의 반만이라도 해야지. 아니 반의 반만이라도' 반성하고 또 다짐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만 되면 또 곧게 세웠던 허리가 축, 늘어지기 마련이지만. 작심일일을 반복하면서 나를 고쳐 잡으려 애썼던 2025년이었다. 번아웃 기간이 1분기 이상이었다는 챗GPT의 분석을 보며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삼십 대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이십 대 동안 경험이 나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에 빠져 온갖 시도를 했던 게 지금의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 효과를 맛본 이상 이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사십 대 때 원하는 대로 살려면 삼십 대가 너무 중요해. 새로운 걸 시작하고 변화를 줄 여유가 있는 마지막이야. 어쩌면 긴장을 기반으로 한 성장 욕구일지도 모른다. 자유도가 높은 삶을 꿈꾸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 할 긴장감.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십 대가 평탄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도 아니고 인간 주제에 어떻게 미래를 확신할까. 살아있을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며 좌절하는 그런 날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원치 않는 결괏값이 나와도 최선은 다했는데 다른 변수가 있어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이 너무 커서 담지 못한 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


최근에 한 작가 지망생의 추천으로 유튜브 시리즈 <72시간의 소개팅>을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진득하게 보는 두 번째 연애 프로그램이다(첫 번째는 하트시그널2다). 웃긴 건 연애 프로그램 보면서도 배경지인 홋카이도 후쿠오카 등이 가고 싶다는 거다. 친구는 내 말에 미치겠다며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가고 싶다. 도시 특유의 분위기가 잘 묻어나는 프로그램이라 가끔 이건 여행 프로그램이 아닐까, 혼자 생각한다.



*작가이자 작가지망생인 윤슬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inwriting_yoon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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