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달려야 할 때도 있지만, 저벅저벅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높은 추진력을 발휘할 때 얻어지는 것도 있지만, 느린 속도로 사유할 때 얻어지는 것도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러 여행지를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을 집으로 가져가는 열정적인 방식도 있지만, 걷다가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멈칫 서서 멍하니 바라보는 느린 여행 또한 유의미하다. 특히 미술관이 많은 경주는 후자의 방식이 유독 어울리는 곳이다. 유적지만큼이나 곳곳에 미술 작품이 많은 경주에는 어떤 미술관들이 있을까.
솔거미술관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로 여겨지는 황리단길에서 버스로 약 25분 거리에 있는 경주엑스포대공원. 1998년 개최됐던 경주엑스포부터 2025년의 APEC 정상회담까지, 행사 내용과 실제로 쓰였던 집기류 등을 재현하고 또 보존하고 있는 대공원 안에는 미술 작품 또한 보존되고 있다. 솔거미술관은 ‘빈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비움의 힘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축가의 마음은 미술관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대공원의 산책하기 좋은 길과 내다보이는 산 그리고 연못 경치를 미술관 내에서도 볼 수 있다.
APEC 2025 KOREA의 주제였던 ‘지속 가능한 내일’을 바탕으로 신라의 문화와 미학을 예술로 표현한 ⟪신라한향 :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가 한창 진행 중이다. 5월 17일까지 전시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수묵화의 거장인 박대성 작가, 불화장(佛畵匠)이자 승려인 송천 스님, 262점의 유리 조형물을 쌓아 올려 만든 신라 석탑을 선보인 박선민 작가와, 금·은박과 전통 안료로 경주의 역사성을 담은 김민 작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경주에서 전시되고 있어 표현에 더 공감하게 되는 작품들은 신비롭고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에 비친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부처의 모습은 밤하늘의 보름달만큼이나 귀하게 느껴진다. 마치 관광객이 모두 돌아간 사찰의 저녁, 하늘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간만큼이나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 외에는 암전에 가까운 낮은 조도의 공간 속에서 반영과 실물, 다르지만 같기도 한 존재들에 몰입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반영의 존재감이, 그리고 존재감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실물과 동일하다면 그 또한 진짜가 아닐까?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전시 공간으로 이동하면 사리병 사리장엄구 등을 모티브로 한 모양의 유리병들이 오층탑의 각 층마다 빼곡히 놓여있다. 번지는 형태로 초록색 파란색의 은은한 색상을 띄고 있는 유리병들이 벽에 걸린 원형 거울에 그대로 비춰진다. 빛을 내는 오층탑과 유리병들은 거울에도 빛을 선사한다. 앞선 공간에서는 물의 성질을 이용해 복사되었다면 이 공간에서는 거울의 성질이 활용됐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담긴 유리병과 탑 그리고 빛이 둥근 거울에 옮겨지니 볼 때마다 소원을 빌고 싶어지는 보름달과 다를 바가 없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언급되는 작품은 박대성 작가의 ⟪코리아 판타지⟫다. 세로 5m 가로 15m에 달하는 초대형 수묵화가 주는 압도감은 대자연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결의 감탄을 불러온다. 한지 위에 그려진 한국적인 협곡과 무지개, 동물과 폭포의 모습은 하나하나 시선으로 그림을 뜯어보게 한다. 어떤 요소에 시선을 집중하냐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게 감탄하게 되는 또 하나의 지점. 이렇게 규모가 큰 작품은 실제로 봤을 때 그 웅장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만큼 직접 솔거미술관으로 전시 나들이를 떠나보자.
우양미술관
경주엑스포대공원 입구에서 도보로 약 20분이면 새로운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사립 현대미술관인 우양미술관에서는 현재도 세계 곳곳을 돌며 개인전을 열고 있는 카우스(KAWS) 작품을 비롯해 ‘비디오 아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을 백남준 작가와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기획전을 볼 수 있다(두 전시 모두 5월 25일까지 전시 예정).
2025년 우양미술관 재개관과 APEC 경주 개최를 동시에 기념하는 백남준 특별전 ⟪Nam June Paik : Humanity in the Circuits⟫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기술과 창작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AI가 창작도 하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인간의 창작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고찰하게 된다. 기술과 인간, 두 존재가 최적의 비율로 섞이려면 앞으로 인간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창작하는 과정과 그 결과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영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들도 우양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Turner: In Light and Shade⟫에서는 터너 자신의 예술 인생에 새로운 장을 풍경 판화로 열었다. 이중 터너가 출판한 판화 71점의 세밀한 묘사를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직접 그린 스케치를 보고 있으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또 영감으로 전환해 그림으로 옮겼는지 알 수 있다. 보고 들은 것을 생각으로 치환하고 이를 다시 나만의 작품으로 발전시키는, 정해진 한계가 없는 무한대의 예술 행위는 앞서 본 백남준 특별전에서 느낀 고민에 희망과 가능성을 준다. 인간의 경험만이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잘 다듬어 선보일 때, 그 작품을 보는 인간은 깊이 감동한다. AI와 같이 명확한 주체를 알 수 없는 기술은 줄 수 없는 고유의 감동을 인간이 여전히 쥐고 있다.
오아르미술관
다시 황리단길로 돌아가도 미술관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황리단길 메인 거리에서 도보 5분이면 능 옆에 있는 오아르미술관에 도착한다. 오아르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창밖으로 거대한 능의 곡선을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많은 관람객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층에 있는 카페만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건물 전체의 한 면이 능을 볼 수 있는 창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이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덕분에 3월 21일부터 개관 1주년 기념 사진전인 ⟪오아르미술관, 경주에 스며들다 – Spatial Connection -⟫이 전시되고 있다. 8월 17일까지 전시 예정인 이번 사진전에서는 미술관의 설계 과정과 공간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역사의 도시, 경주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미술관을 완공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시도가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전시를 본 뒤에 창밖 또는 옥상에서 외부 풍경을 보면 미술관이 가진 힘에 깊이 결부된다.
사진전 외에도 최영욱 작가의 개인전인 ⟪쉼표 : 비우고, 머무르고, 채우는⟫도 진행되고 있다. “삶은 어떤 흔적을 남기며, 그 흔적은 어디로 흘러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탐구한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앞서 우양미술관 전시를 보면서 생각한 것들에 연장선을 그을 수 있다.
*각 미술관별 전시 기간은 미술관 사정에 의해 변동될 수 있습니다. 방문 전 진행 중인 전시를 확인하세요.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2차 사용 및 수정을 모두 금합니다.
*본 글은 SWITE 매거진 5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