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전환의 흐름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불가(佛家)에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만남에는 적절한 시기와 운명적인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매년 봄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하고 겨울이면 작별을 고하는 교사들에게, 교실은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가장 찬란한 시절인연을 맺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학창’ 시절의 인연은 특히 각별하다. 삶의 윤곽을 그리는 시기에 교사와 맺는 깊은 인연에는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교육계의 화두인 AI 디지털 교과서(AIDT)를 필두로 한 디지털 대전환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이 귀한 시절인연의 힘을 망각한 채 정교한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이 교육의 핵심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고 있다.
학창 시절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던 마음은 나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연료였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풀었고, 주저하다가도 발표를 한번 더 했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성실함을 품었다. 그리고 어제, 그 선생님을 9년 만에 다시 만났다. "저 많이 컸죠?"라며 어른이 된 나에 대해 아이처럼 쏟아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 아이들을 대하고 사랑하는 방식이 사실은 그 시절 선생님께 받았던 사랑의 모양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가진 삶의 태도와 윤리 역시 선생님께 배운 것이었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시절인연은 졸업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교사로 일하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동시에 이끄는 나침반이 되어 지금의 교실로 나를 데려왔다.
이처럼 교육의 본질은 ‘좋아하는 마음’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에 있다. 지난 방학식 날, 급식을 먹고 있는데 우리 반 학생들 3명이 손 꼭 잡고 쪼르르 오더니 "선생님 한 학기 동안 저희를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사랑해요"라며 손하트를 만들어줬다. 아기참새 같은 목소리로 해맑게 웃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나는 더 좋은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밥을 대충 먹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자란 아이가 이제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워가는 이 숭고한 대물림이야말로 교실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AI 디지털 교과서가 예고하는 미래는 사뭇 다르다. 정부는 AI가 학생의 성취도를 데이터로 분석하고 개별화된 학습 경로를 제시하는 '맞춤형 교육'의 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AI는 학생의 취약한 단원을 1초 만에 찾아낼지언정, 학생이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 밤잠을 설쳐가며 문제를 풀게 만드는 ‘선한 욕망’은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 알고리즘은 오답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어도, 그 오답 뒤에 숨겨진 아이의 지친 마음이나 배움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맞춤형 정보는 얼마든지 줄 수 있겠지만 아이의 삶을 지탱하는 ‘인연’이 될 수는 없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교사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디지털 활용 전문가나 디지털 기기 관리자가 아닌 아이와 정서적으로 깊게 연결되는 ‘인체온(人體溫)’을 지닌 조력자여야 한다.
따라서 미래 교육은 AI를 통한 기술 시스템적 개혁도 좋지만, 한 사람의 삶을 장기적으로 견인하는 교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존하고 확장할 것인가를 정책 논의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 AI를 교사가 아이와 관계 맺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돕는 보조 장치로 설계 및 활용해야 한다. 예컨대 학습 진단과 반복 훈련 같은 기계가 잘하는 영역은 기술에 맡기되, 그 결과를 해석하고 아이의 마음 상태와 연결해 지도하는 판단의 주체는 반드시 교사로 남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 연수의 방향 또한 ‘디지털 기기 활용법’도 좋지만, 데이터를 교육적으로 해석하고 정서적 지도로 전환하는 전문성 강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진정한 교육 개혁은 디지털 기기를 한 대 더 보급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교사가 한 아이의 얼굴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학급 규모, 행정 업무로 분절되지 않는 수업 준비 시간, 관계 중심 교육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여유가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기술은 교사의 시간을 절약해 주어야지, 교사의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정책이 ‘좋아하는 마음’이 가진 성장의 힘을 간과한 채 데이터의 효율성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네모난 화면 속에서 지식은 얻을지언정 삶의 나침반이 될 스승은 잃게 될 것이다. 교사가 아이와 맺는 그 소중한 시절인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도울 때 교육의 힘은 더욱 커진다.
시절인연. 교사와 학생들에게 이보다 더 숙명적인 단어는 없다. 선생님이 좋아서 더 성실히 임하게 되고, 선생님이 믿어줘서 스스로를 믿게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의 힘은 그 어떤 기술보다 강하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려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나에게 찾아온 이 소중한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연다. 그 따뜻한 연결이야말로 그 어떤 디지털 기술보다 강력한 ‘진정한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