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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이슬 Nov 24. 2022

너는 나의 귀인

암 진단 당시 살얼음판 걷는 것 같던 나의 기분.

가슴을 미여 잡고 쏟아내듯 울던 친정엄마.

출산한 딸 부기 빨리 빠지도록 농사로 수확한 호박과 당귀로 즙을 만든 아빠의 기쁜 표정이 한순간 석고가 된듯한 표정.

모든 상황을 함께 고군분투하며 애쓰며 운 남편.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는 사람들의 따듯함.

며느리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가 퇴근길에 걸어가려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결국 버스 타고 왔다는 이야기.


그 밖에 등등.

위의 내용은 그간 나를 중심에 두고 벌어진 감정과 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인생의 주인공은 언제나 바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사람들은 조연으로 산다. 우리가 왜 조연인지 생각해보면 체면치레라는 이유가 포함될 것이다. 체면이란 한 개인이 남들에게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나타내는 자아 이미지라고 한다. 그러나 체면이라는 명분을 다소 자존심 상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비위 맞추고 살기 때문이다. 나보다 남들에게 포커스를 두며 욕을 먹진 않을지 비위 맞추고 살아서 조연인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가끔 주변에 위풍당당한 사람이 있으면 멋지면서도 은근히 배알 꼴리던 적, 난 빈번하게 있었기에 당신에겐 한 번도 없었는지 묻고 싶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 ’비‘가 한때는 ’깡‘이라는 노래로 조롱당하듯 대중의 시선을 받은 것도 저 가수의 빠짐없이 잘난 모습 중에서 어쩐지 뭐라도 하나 꼬투리 잡고 싶었던 마음. 즉, 배알 꼴렸던 것은 아닐까.



나도 조연으로 살아왔다가 한순간 '암'이라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비로소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

병마를 알게 된 때부터 ’레디 액션‘하듯 매일매일 씬(장면)이 탄생했다. 그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시퀀스(장면의 집합)가 되었고 파노라마처럼 넓은 시야에서 내가 훤히 보였다.







주연을 맡은 그 드라마에 귀인이 한 명 등장했다.

임신 중 유방암을 알았으므로 오롯 나의 삶만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사지 짱짱하게 멀쩡히 살다가 중증 환자가 되어본 것도 처음인데, 엄마가 처음인 삶까지 중첩되었다. 한순간 두 개의 임무를 동시에 부여받았다. 처음 맡아보는 무거운 임무들이었다. 환자가 되는 것이야 내 몸뚱이니까 어떻게든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싸우겠지만 엄마라는 삶은 어딘지 모르게 두려웠다.



그 어린 핏덩이를 낳자마자 안아보지 못했다. 제왕절개를 한 까닭도 있지만 출산 후 조리원이 아닌 대학병원에 계속 입원했기에 나와 아이는 분리되었다. 나는 유방암 병동실, 아이는 5일간 신생아실에 있었고 아침, 저녁으로 잠깐 면회가 가능했다. 그마저도 코로나라는 상황 때문에 남편과 함께 출입하지 못하고 겨우 나만 허용되었다. 출산 후 아이를 본 적 없어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느린 걸음으로 아이부터 보러 갔다. 그러나 마음만은 종종걸음이었다.



수술 후 3일째가 되어서야 유리창 너머 아이와 첫 마주하는 그 순간.

형용할 수 없이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이 세상 이쁜 말들을 깡그리 모아서 그 아이에게 표현해주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생명체였다.  






나와 아이를 분리시키기란 차가운 심장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살아서 승리해야 아이의 삶도 책임질 수 있는 거니까, 지금은 나만 챙기자고 정신을 차려봐도 아지랑이가 춤을 추듯 끊임없이 아이가 아른거렸다.



나는 병원에 더 머물러야 했고 아이는 5일까지만 입원이 가능했다. 태어나 6일째 되는 날 얄짤없이 아이 혼자 퇴원수속을 밟았다. 아이만 데려가기 위해 미리 예약한 조리원 원장과 친정엄마가 왔다.



유리창이 아닌 바깥에서 아이를 처음으로 마주하니 또 다른 모습이었다. 겉싸개로 꽁꽁 싸매고 혹시 놓칠세라 내가 안는 건 자제했다.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볼만 만졌다. 신생아의 말캉한 볼은 마치 내게 주어진 특권 같았다.



몇 주 뒤면 볼 아이지만 그때만큼은 세상 서러워 터질 것 같은 눈물을 목으로 꿀꺽 삼킨 뒤에 잠긴 목소리로 아이에게 겨우 말했다.

‘소복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잘 이겨내서 너한테 곧 갈게.’


아이를 안고 있던 친정 엄마는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한편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환자의 삶보다 엄마의 삶이 더 두려웠던 이유는 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조연으로 사는 예전 습관은 관성처럼 튀어나와 그 아이의 조연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고로 부모란 아이가 잘 자라도록 위험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발달 시기에 맞는 행동, 과업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조연도 맞다.

하지만 그 조연의 역할, 그것이 넘치게 과하면 찰나의 모든 순간 아이를 이유로 내세우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 ‘널 너무 사랑해서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하는 뻔한 대사를 목이 터져라 지를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절대 이해되지 않을 부모만 아는 사랑의 언어다. 아이는 그로 인해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거나 제할 말 못 하며 위축될 가능성만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절대 원치 않았던 다시 나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날개 한 번 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를 보는 순간 항상 옆에 찰싹 붙어 밀착 육아하고 싶은 마음이 우뚝 솟았다.



아이와 나는 엄연히 다른 개인이다. 우리가 가족이 되어 특별한 연을 맺었다 해도 내가 그 아이의 조연도, 아이가 나의 조연도 될 순 없는 일이다. 나와 남편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부모의 권위를 잃지 않으며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독립시키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부족하지만 무진 노력할 것이다.



단 하나의 정자와 난자가 합을 이뤄 마침내 찾아온 그 아이는 내게 분명 귀인이었다. 나의 몸에 암이 있으니 얼른 알아차리라고 임신 중 신호를 준 것부터 앞으로 매 순간 육아하며 마주칠 수많은 깨우침까지. 귀인 덕분에 나의 드라마에서 백발 멋쟁이 할머니가 되었다는 완편을 끝끝내 쓰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이지 너는 나의 귀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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