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소소 이야기
* 남평 문 씨
유림 처사가 된 이들이 두류산(지리산) 유람을 핑계로 나주 남평 땅을 자주 찾았다. 선왕의 죽음과 임금에 대한 원망이 글로 적혔다. 권력에서 밀려난 영호남 선비들의 도포 자락에 숨겨진 문서가 유림 처사들 사이로 급속하게 퍼졌다.
충청도 청주 땅에서 일어난 난亂은 포박된 이인좌의 능지처사로 끝났다. 말뿐인 탕평책의 불만이 유림 선비들을 난에 가담하게 했다. 선왕인 경종의 죽음을 이유로 한 집권 세력과 반대파 간의 다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조선왕조 최대의 역모 사건에는 농기구를 든 굶주린 이들과 노비들도 배고픔을 면하고자 참여하였다. 죽음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심한 가뭄으로 죽는 이가 많았고 스스로 도적이 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무지렁이 백성들의 소요에 놀란 집권 세력은 사태의 진압을 독촉하였다. 관군의 토벌 작전으로 반란군을 이끌던 자들의 목이 장대에 걸렸다. ‘경종 독살 혐의’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자들에게 왕은 무자비했다. 임금에게 반기를 들었던 영호남 선비들이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향리의 눈을 피하고자 낮에 농사를 짓고 밤에 글을 읽었다. 고을 수령은 땅을 얻는데 관심만 있었을 뿐 군민의 삶을 살피지 않았다. 흉흉한 민심에 지역 사람 절반이 역적이 되었다. 영남의 선비들도 더 이상 죽령을 넘지 않았다.
“영남은 본디 추로(鄒魯‧공자와 맹자)의 땅이므로 차별 없이 등용하라”
“지금도 영남인은 백의白衣를 입고 죽령재를 넘는 자가 없더냐”
“영남인들 소원은 일개 진사進士가 되기에 그칩니다”
나주괘서사건은 영호남 유림 처사들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낮에 밭 갈고 밤에 책 읽던 남평 문 씨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구황救荒에서 살아남은 냉이가 작은 꽃을 피우고 나무에 앉은 새들의 목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봄이 왔지만 겨울 묵었던 밭고랑은 더 이상 갈리지 않았고 마구간의 소도 주저앉아 되새김질만 하였다. 할아버지는 아범을 방으로 불렀다. 부름을 받은 아범이 달빛 그림자를 앞세워 안채로 들어갔다. 바느질하던 모친이 돌아앉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렸는지 방안의 호롱불이 밝아졌다.
“장마 들기 전에 몸을 피하는 것이 어떠냐”
“이 많은 식구들이 어디로 갑니까”
“경상도 땅이 어떠냐”
“나주 목사의 눈을 피하기가 쉽습니까”
“지리산으로 가자.”
모친이 내뱉은 짧은 탄식에 아범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할아버지는 재떨이에 걸쳤던 곰방대를 물었다. 볼이 씰룩거리자 호롱 불꽃이 빨려 들었다. 불꽃이 담배 속을 파고들자 아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댓돌에 내려서는 아범의 겨드랑이를 찬 기운이 날카롭게 쑤셨다.
* 한 들
나주 땅 남평은 들이 넓었다. 서쪽으로 영산강이 서해 바다로 흘렀다. 문 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글을 읽고 썼다. 글을 하는 문한文翰 선비였다. 세상의 흉흉한 소문을 기록한 나주괘서 사건은 고을 수령인 나주 목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문 씨 일가들은 조용히 떠날 채비를 했다. 흉년의 기근을 핑계 삼았다.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주로 시집간 고모가 집으로 찾아왔다. 삼 형제와 누이, 조부모가 앉자지만 방 공기가 차가웠다. 모두 굳은 얼굴이었다. 사립문 밖 바람 소리도 방 안으로 들지 못했다.
“대가족이 몸을 숨기기는 힘듭니다.”
“남평에서 지리산은 멉니다.”
“제 식솔들은 북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제주도로 갑니다. 여기는 일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가렵니다.”
글을 읽는 처사處士였던 할아버지는 고을 수령의 눈 밖에 난 뒤 글 읽고 쓰는 일을 멈추었다. 아이들은 배를 곯았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들에 나가 냉이와 쑥을 떴다. 곁에 선 손녀가 누런 콧물을 달았다. 고달팠다. 영산포에서 뱃 일을 하던 식구들은 제주도로 갔다. 영영 이별이었다.
남은 식솔들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광양 땅을 지나 섬진강을 건넜다. 하동에 터를 잡았다. 전에 살던 지역과 다르지 않았다. 향리들의 감시로 나주 땅에서도 하동 땅에서도 육신은 안녕하지 못했다. 감시의 눈을 피해 터전을 다시 옮겼다. 하동 지리산 형제봉 아래에 거처를 마련했다. 화전을 일구며 대식구가 살기에는 퍽퍽했다. 풀뿌리와 소나무 껍질로 주린 배를 채웠다.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쑥버무리 개떡이라도 찌는 날은 아궁이 불 내에 아이들이 모두 정지문에 달라붙었다.
방 안 공기는 무거웠고 곰방대만 검붉은 빛이 일었다 졌다를 반복했다. 동생들의 장난과 웃음소리만 문밖에서 들렸다. 작은아버지도 이미 결심한 듯 할아버지의 결정만 기다렸다. 아침부터 집안이 소란했다. 세간살이를 챙기고 큰아이는 작은아이 옷을 단단히 여미었다. 작은집 식구들은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할머니는 종지에 간장을 담았다.
본래 태어난 고향이 아니었으니 아쉬움은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신 곳이니 자꾸 되돌아섰다. 형제봉을 돌아 섬진강을 끼고 북쪽 남원으로 갔다. 함양 땅과 무주를 거쳐 산간 충청도로 갔다. 이듬해부터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할머니는 정화수를 떠 놓고 새벽마다 손을 빌었다. 할아버지도 글을 읽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고 아버지는 새끼줄만 꼬았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방으로 불렀다.
“여기서 동쪽 갱 분으로 내려가면 서포 땅이다.”
“전에 살던 나주 남평처럼 갱 분이 있고 들도 너르다 하니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세간을 챙겼다. 작은집 식구들이 분가하여 식구는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형제봉에서 옥종 땅은 멀지 않았다. 수곡 덕천강 촌부에게 부탁하여 하루를 묵었다. 수곡 땅과 서포는 하루거리지만 고을 수령이 있는 곤양읍을 거쳐 가기는 부담이 되었다.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했다. 하동 진교를 돌아 서포로 갔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초가 몇 채가 있는 동구에 도착했다. 사람 사는 집에서 저녁연기가 올랐다.
마을 노인에게 부탁하여 비어있는 아래채를 얻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집 지을 땅을 보러 다녔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갯벌에서 바지락을 주웠다. 소금기 묵은 들이 버려져 있었다. 갯벌은 좁았지만 전에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생들은 매일 갯벌에서 찬거리를 주웠다. 바다 건너 산 위에 달이 걸릴 때까지 갱 분에서 놀았다.
“형! 저산이 되게 커다. 저산은 이름이 뭐야?”
“내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물어보자.”
사천만 너머의 산은 컸다. 아침 해와 저녁달은 매일 산 뒤에서 올랐다. 물 때에 맞춰 갯벌을 갈 때마다 바다 건너 저쪽 땅이 궁금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품을 팔아 볏짚을 얻었고 초가의 지붕을 엮었다. 대충 걸친 솥에 호박과 개발을 넣고 할머니는 불을 지폈다. 솥뚜껑 사이로 개발 삶는 냄새가 들렸다. 아이들은 마당을 뛰었고 어머니는 얻어온 된장을 솥에 풀었다. 동생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는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저 바다 건너 산 이름이 뭡니까?”
“애롱산(와룡산)이다.”
“맨날 산 뒤에서 해가 오르고 달이 오르고 신기합니다.”
“담에 네가 한 번 가봐라.”
삼천포 남양면 한들은 넓었다. 큰 들이었다. 수만 근이 넘는 고인돌이 들 가운데 있었다. 배를 곯지 않는지 사람들도 몸집이 있었다. 산은 깊지 않으나 물이 좋았다. 갱 분은 뻘이 없고 모래가 많았다. 서포 갱 분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버지와 돌아본 두 해 후 세 개의 하천이 있는 남양 땅 한들로 이사를 했다. 갱 분과 가까운 냇가에 터를 잡았다. 우물을 팠다. 볕이 잘 들고 물이 좋았다. 뒤 안 텃밭에 감나무를 심었다. 부부 감나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소작농이 되었다. 천수답이지만 나락 심을 논을 얻었다. 고매와 감자를 끼니로 매일 먹었지만 할아버지 밥에는 아주 가끔 쌀알이 담겼다. 동생들도 가끔 보리밥을 먹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들 땅에 정착한 지 여러 날이 흘렀다. 고을 수령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해 오르면 들로 나가 허리 굽히고 금성별 나오면 집으로 돌아왔다.
* 아버지의 길
뻘이 없는 갱 분에서 강아지 풀로 쏙을 잡았다. 쏙 구멍 밖으로 집게발이 올라오면 잽싸게 낚아챘다. 약은 녀석들은 집게발을 보이지 않았다. 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어 집게발을 누르고 호미로 파서 쏙을 잡았다. 나갔던 물이 구덩이로 밀려오고 전에 살던 서포 하늘에 노을 걸리면 쏙과 돌게가 든 망태기를 어깨에 걸치고 논두렁을 일렬로 걸었다. 행진하는 군인처럼 돌아왔다. 밥 짓는 연기가 초가지붕 위로 솟고 남새밭에서 정구지를 뜯는 엄마의 모습에 걸음이 빨라졌다. 걷는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오줌을 뿌리며 논으로 곤두박질쳤다. 초가지붕에 앉은 박꽃이 예뻤다.
사립문 밖 텃밭의 정구지가 짙었다. 엄마의 손가락에 짙은 초록물이 들었다. 저녁 밥상에 오를 정구지 된장국 생각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할매는 잡아 온 쏙과 돌게를 대바구니에 쏟았다. 놀란 쏙이 집게발을 꼼지락거렸다. 할매는 쏙의 머리 껍질과 다리를 뜯었고 껍질 속의 노란 지방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머리 껍질과 지방이 떨어졌지만 뜯기지 않은 다리는 계속 꼼지락거렸다. 솥의 된장물이 끓었고 밝은 흙색의 쏙이 붉게 변했다. 솥 안 국물이 솟구치고 거품을 뿜을 때 할매는 간장을 솥 안에 둘렀다. 솟구치던 국물의 기세가 폭삭 꺼졌다. 정구지 고명의 쏙 된장국이 할아버지 밥상으로 나갈 때 뱃속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서천 노을을 등 뒤로 하며 걸었던 논두렁 길 위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아버지도 보았던 애롱산(와룡산)에 달이 올랐다. 초가지붕이 박꽃을 해마다 피웠다. 논두렁길 걸어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머니는 매일 정구지를 잘랐다.
* 마지막 만찬晩餐
남양 땅에 터 잡고 성주신을 모신 지 180년이 흘렀다. 6대조는 고성 와룡산 향로봉 아래를 자신의 유지로 정했다. 가묘를 쓴 지 6개월 후 고성 와룡산 향로봉으로 이장을 했다. 자손들이 번창했다. 그 100년 후 음력 유월 초엿새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삼천포 땅 와룡산 자락에 주검이 모셔졌다. 4명의 아들과 열여섯 명의 조카가 상여를 따랐다. 동네에서 제일 어른인지라 청룡과 백호의 풍수가 좋은 자리에 묘를 썼다.
할아버지 인금은 작은 포구를 끼고 있는 남양면 미룡 동네로 장가를 갔다. 할머니 정명팔은 기골이 컸고 맏이였다. 오줌 요강과 곰방대를 가마에 싣고 낭고산을 넘어 한들로 시집을 왔다. 새색시는 생활력이 강했다. 시동생들도 잘 따랐다. 부엌살림이 늘었고 아궁이 불이 꺼지질 않았다. 대식구가 살기에 집이 금세 좁아졌다. 시동생들은 모두 결혼을 하여 사천 땅 곳곳으로 분가를 했다.
1938년 음력 9월 아버지가 태어났다. 7남매 중 여섯째였다. 장녀인 고모는 남쪽 바닷가 작은 포구의 이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땅이 부족한 곳이라 쌀이 귀했다. 고모부는 어린 자식과 아내를 두고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갔다. 고모는 친정에 자주 왔다. 할머니가 사돈댁 갈 때 광목으로 만든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갔다. 돌아온 할머니의 몸에서 비릿한 짠 내가 났다. 큰아버지는 윗동네 최 씨와 일찍 결혼 후 분가를 했고 일본사람의 명령인지 꼬임인지 분명치 않았지만 만주땅으로 이주를 했다.
증조할머니가 계신 대식구였다. 가을 농사가 끝나면 일본인들이 공출을 빌미로 추수한 쌀의 대부분을 걷어 갔다. 식구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할머니는 갱 분에서 먹거리를 구했다. 손끝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갱분가에서 자란 작은 풀을 베고 말려 작은 덕석을 만들었다. 떡을 찌거나 콩나물 키울 때 쓰는 시루밑은 귀한 물건이라 금방 쌀과 바꿨다. 일본말을 조금 하는 할머니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음력 2월 증조할머니가 대청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볕이 들었지만 바람이 찼다. 지나가는 바람 끝에 고기 냄새가 묻어왔다. 할머니를 손짓으로 불렀다.
“어멈아, 저 일본집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개를 잡았는지 아침부터 시끄럽네요.”
할머니는 일본집에서 개고기 삶은 국물 한 사발을 얻어왔다. 대청 볕에 누운 시모를 일으켜 한 숟갈을 입에 넣어 주었다. 증조할머니는 볕이 든 자리에 다시 누웠고 긴 잠을 주무셨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마침내 종부의 삶이 내려졌다.
떡을 좋아했던 증조할머니의 제사상에는 항상 떡이 올랐다. 떡시루를 가마솥 위에 올리고 시루밑을 깔았다. 삶은 콩을 펴고 절구에서 찧은 하얀 쌀가루를 올리고 다시 강낭콩을 올렸다. 시루에서 김이 오르자 할머니는 아궁이의 불을 껐다. 가마솥과 떡시루 간 김 빠짐을 막으려 둘러 붙였던 하얀 쌀가루 떡을 떼서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소금 간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 맛도 없었다. 몇 겹인지도 모를 켜켜이 쌓인 시루떡을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콩은 결정이 보였고 하얀 쌀가루는 찰진 떡으로 변했다. 제사 끝난 후 돌아가는 아들들의 손에 보자기가 들렸다.
할머니는 아들들을 위해 정안수로 집안의 신과 소통을 했다. 아픈 아들들의 병을 치료하고 군에 간 손자들의 무사함을 빌었다. 주술사로서 제사를 준비하고 죽은 영혼을 다음 세상으로 인도했다. 매년 농사 끝나면 햅쌀밥을 지었고 한 해의 안녕함에 대한 감사함을 조상들에게 고했다. 정지의 성주신에게는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이전 조상 때부터 해오던 집안의 전통이었다. 안녕과 풍요를 빌던 할머니는 조상들의 부름을 받아 93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질곡의 삶을 내려 놓은 종부는 어머니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문가들의 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