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날.

by 정자까야

여름씨 오늘 점심 괜찮아?


팀장이 팀 단위 식사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한 건 처음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외려 그 일이 아니면 더 걱정이 될 일일 것이다.


팀장은 식사 중 이런 저런 회사 일과 여름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야 자리를 함께 한 이유를 얘기했다.


여름씨. 짐작했을 수는 있는데..지금 인사 시즌이잖아. 개인 기여도 고과 문제 때문에...


다행이었다. 여름이 예상했던 문제였다. 팀에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면 어쩌나..그게 오히려 걱정이었다. 시장이 싫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드러난 악재는 더 이상 악재가 아니다. 대학 시절 경제학 원론에서 내내 들었던 얘기다. 여름은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고 싶었다. 시장을 이루는 것은 개별 인간이다. 개개인에게도 가장 피하고픈건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 일은, 생각보다 파장이 크지 않다. 실제 그 일이 있기까지 예상되는 슬픔, 고통, 번뇌는 매일 조금씩 나눠져 내면화된다.


여름씨. 올해 정말 성실하게 잘 해줬어. 우리 팀 성적도 잘 나왔잖아. 여름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백업을 너무 잘해준거지. 근데..


여름씨도 알겠지만 우리 팀에선 박차장이 승진 서열상 가장 가능성이 높아서..이번 고과도 박차장을 우선 배려할 수밖에 없었어..박차장도 정말 열심히 했고..일 안하면서 고참이라고 고과 받는 시대는 아니니까..여름씨가 이해해줬음 해서..같이 식사하자고 한거야.


팀장은 괜찮은 선배였다. 팀장뿐만 아니라 팀 전체의 멤버가 좋았다. 박차장도 열심히 한 걸 여름도 알고 있다. 식사 후 여름은 혼자 잠시 걸었다. 날이 추웠다. 고과 문제는 예상대로였고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여름의 마음을 끈 건 세상 일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자신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평소에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팀장은 박차장도 칭찬하고 여름도 칭찬한다. 하과장에게도 고생했다고 하고 이대리도 항상 챙긴다. 하지만 팀장에게 선택의 순간이 오면 결정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정은 없다.


겨울씨. 이번 크리스마스..저랑 같이 보낼래요? 여름은 날이 쌀쌀해질 무렵 겨울에게 무심한 듯 툭 던졌다. 가볍게 한 제안이라는 듯. 이 가벼운 제안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가볍게 보일까 고민하며 몇 날을 보냈다. 돌덩어리로 만든 비눗방울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보기엔 비눗방울이었다.


아..여름씨. 미안해요..선약이 있어서요..


겨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가을씨랑요?


굳이 확인할 필요 있었을까..가을이 아닌 사람과의 선약이었다면 겨울은 얘기했을 것이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든지..가족들 모임이 있다든지..겨울의 미안함 뒤엔 각주가 없었다.


팀장과의 식사는 며칠 전 겨울과의 통화를 떠오르게 했다. 거의 완벽한 오버랩이었다. 중요한 순간 팀장과 겨울은 선택을 해야했고 슬프게도 그 대상이 여름은 아니었다. 여름은 이런 기념일이 오히려 슬픈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2인자 혹은 언더독에겐 세상이 차라리 평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씁쓸함을 안고 퇴근했다.


날이 추웠다. 평년 기온을 웃돌던 날이 요며칠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마치 날씨마저 기념일을 알고 있다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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