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의림지에서 길 하나 건너면 막국수집이 있습니다. 더위를 피해 막국수집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알바 분들은 젊은 편이었는데 아마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A와 막국수 하나씩 시키고 나니 아쉬운 느낌이 들어 메뉴판에 있는 치킨을 시켰습니다. 막국수집에 치킨이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반 마리만 시킬 수 있어서 그냥 시켜보았습니다. 메밀로 반죽을 만들었는지 메밀치킨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치킨을 한입 베어물었을 때 이곳이 대체 왜 치킨집이 아니라 막국수집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삭하면서도 고소한 튀김옷, 튀김옷 안의 진한 육즙과 촉촉한 속살까지. 맛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맛의 막국수에 비하면 치킨은 매우 맛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맛집이었습니다. A군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렇게 밥을 맛있게 먹고 다시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버스정류장 가는 길은 날씨가 맑아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버스정류장은 한 100m정도 걸어가면 되었는데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오른쪽에 펼쳐진 의림지의 풍광이 눈길을 뺏었습니다. 자그마한 호수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의림지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버스정류장에 앉았습니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왔고, 우리는 제천역에서 의림지로 왔던 길을 되돌아오다 중간에 내렸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장락동 칠층모전석탑까지 가는 버스가 거의 없어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죠. 다이소 제천청전점 근처에서 내려 내제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내제로를 따라 장락동으로 가는 길은 언덕길이어서 무척 더웠습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길과 옛날 느낌을 주는 도로변의 상가들이 정겨워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를 수 있었습니다. 언덕 끝에 오르자 자그마한 아파트들과 제천시립도서관, 그리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공원이 있었습니다. '꽤나 살기 좋은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언덕길을 매번 걸어올라와 도서관에 와야 한다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하루하루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정말 좋은 날씨와 처음 보는 풍경에 마음을 온통 뺏겨있어 언덕길을 올라 도서관에 오는 것마저도 낭만과 즐거움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매순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무척 큰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 한길을 건너면 논이 펼쳐집니다. 아파트 옆에 논이 있는 시골이라니. 참 대조적이지만,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닦인 도시의 길을 나와 구불구불 시골길로 바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차들은 거의 다니지 않고, 밭에서 키우는 채소와 천변의 맑은 물들이 제가 가는 길을 더욱 예쁘게 꾸며주었습니다. 시골길을 가다 옆을 돌아보면 청명한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그 아래 늘어선 아파트들과 비닐하우스들이 어우러져 전형적인 한국 중소도시의 한여름을 보여주었습니다. 푸름이 가득한 풍경아래에선 도시의 차가움은 사라지고 정겨움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었을까요? 멀리 잘 지어진 기와집 한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잘 보니 사면이 전부 뚫린 정자더군요. 저와 A군은 잠시 풍경에 미뤄두었던 더위가 한 번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정자로 다가갔습니다. 정자 옆에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뒤에는 화장실이 있더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열사병에 걸리지 않을까 싶어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머리 위에 끼얹었습니다. 무척 시원해졌습니다. 극락이 따로 없었죠. 그렇게 더위를 좀 식히고 나니 이제야 석탑을 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석탑이지만, 벽돌로 만든 전탑 같습니다.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석탑이기 때문이죠. 이를 모전석탑이라고 하는데 모전석탑은 경북지역이나 경북지역에 연해 있는 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지역색 있는 석탑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이 석탑은 나말여초인 10세기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6.25전쟁 때 피해를 입었는데 1967~1968년에 석탑을 해체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해체복원 전에는 어떻게 서있나 신기할 정도의 모습이었는데 복원 후에는 지금처럼 깔끔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설명을 좀 했으니 이제 석탑을 눈에 담아야 겠죠. 강렬한 햇빛아래 절터에 우뚝 솟은 검회색의 석탑은 사람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습니다. 시골과 도시, 그 사이의 석탑.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 어느 곳에 두어도 어울리는 석탑은 이곳에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곳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될 만큼 내력있고 나름의 멋이 있는 석탑이다 보니 그 옆에 절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제대로 갖추어진 절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절의 모습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다만, 우뚝 선 석탑만 놔두었어도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불법(佛法)을 표현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석탑을 보았으니 이전 절터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어마무시하게 큰 절은 아니었을지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란 것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하나 주춧돌을 살피며 세월을 더듬으며 상상 속에서 천천히 절을 세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절을 다시 무너뜨리고 터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니 현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상은 늘 변화하고, 절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도시가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생기는 것이 못마땅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수 있으나 이것은 모두 순리대로 그저 변화하는 것뿐이니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저는 깨달은 자가 아니기에 줄곧 자리를 지켜온 주춧돌에 계속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차를 타고 관광객 두 분이 오셨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답사객에 가까웠습니다. 석탑을 자세히 관찰하러 오셨더군요. 이 날씨에 이 땡볕에 이 절터까지 와서 석탑 하나 볼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요? 아, 제가 있었군요. 끌려온 A군도 있었고. 그래서 그 분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저희를 쳐다보고는(물론, 저희도 그 분들이 신기했습니다.) 석탑보러 왔냐고 물으시면서 다 봤으면 가는데까지 차를 태워줄테니 타지 않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저와 A군은 망설였고, 망설이는 동안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감사하지만, 저희끼리 가겠다고요. 땀에 옷이 너무 젖어 민폐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 분들은 석탑만 보고 가시고, 저와 A군은 절터를 보다가 옆 정자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다시 세수까지 하고 오니 그늘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 살 것 같더군요. 그렇게 조금 쉬자 A군이 말했습니다. 차에 얻어 탈 걸 그랬다고. 너무 덥다고.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해줬습니다.
"네가 선택한 나와의 여행이야. 악으로 깡으로 버텨."
그 말을 듯고 헛웃음을 짓는 A군을 보며 깔깔거리다 절터를 빠져 나왔습니다. 시간은 오후 세시 경, 너무 더워서 의림대로로 가는 언덕을 넘어갈 자신이 없어서 내토로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으나 버스가 올 리가 없죠. 의림대로는 가야 버스가 좀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20분 여를 기다리다 버스를 포기하고 의림대로로 가는 언덕길을 다시 올랐습니다. 그래도 아직 한창인 20대 남성 둘이라 힘들기는 했어도 어렵지 않게 다시 의림대로에 와서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다시 탄 버스는 의림지를 갈 때 탔던 31번 버스. 기다린 지 1분만에 와서 정말 어이가 없긴 했지만, 일찍 오면 좋은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제천역 근처에 잡아둔 숙소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