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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Jan 31. 2024

소원을 자유롭게 가지는 세상

<위시>

 처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날, 소원을 빌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수한 별들이 고정된 밤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별똥별. 마치 간절한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밤하늘을 벗어나 별이 이 세상으로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그 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제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법한 무언가를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겠죠. 그로부터 많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도시의 불빛에 둘러싸여 밤하늘의 별을 보지 못합니다. 종종 사람들이 만든 불빛 저 너머 하늘의 끝에는 별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종종 하늘에 대고 기도합니다. 가스덩어리란 걸 알면서도 기댈 곳이 없을 때면 마음속으로 대화를 걸어봅니다. 제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면서요.


 영화 <위시>에서는 소원을 마법사 왕에게 맡긴 왕국의 국민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왕은 소원을 선별해 통제하고 자신이 맘에 드는 소원만 이뤄줍니다. 소원을 잊은 채 살아가는 국민들은 행복해보이지만, 무언가 비어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지만, 정작 그 소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사람을 비롯한 생물체의 본질은 유전자를 잘 전달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이 모든 생물체 중에 그러한 본질을 거절하고 새로운 삶의 본질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법사 왕이 빼앗은 소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표이자 자신이 선택한 삶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뺏긴 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평화롭지만, 비어있습니다.


 주인공 아샤는 소원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소원을 별에 빌죠. 그리고 별이 내려와 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도와줍니다. 별이 내려와 소원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두 별과 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특별함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이루지 못할지언정 하나하나 자신 마음속 깊은 바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무시할 수 없으며, 중요합니다. 자신 삶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개인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소원과 정체성을 존중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왕은 왕국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이들의 소원과 정체성을 무시합니다. 자신이 만든 왕국의 목표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죠. 왕국민이라는 단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모습은 마치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왕국민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만들어진 왕국은 이제 왕국민의 소원을 이뤄주는(그마저도 왕의 마음에 드는 소원만 이뤄주는) 오직 왕 한 명만을 위한 왕국으로 변모합니다. 이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 주인공 친구들, 왕비는 저항합니다.


 저항은 약했습니다.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 왕에게 백성들 몇 백 명이 저항한다고 이길 수 없습니다. 그 강력한 힘에 모두의 손발이 묶이고, 왕은 별마저 손에 넣고 모두의 소원을 자신의 맘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왕의 강력한 힘은 모두의 연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소원을 되찾고자 하는 모두의 간절한 바람은 마법의 힘을 무력화하고 모두에게 소원을 되돌려줬습니다. 개인의 소원과 정체성을 찾은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합니다. 서로서로 소원을 도와주고, 이루어가며 왕국이 행복해졌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모든 이들이 소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큰 벽에 부딪혀 소원을 포기하거나 바꿀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삶이 허락해 준 시간이 짧아 소원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나 소원을 품을 권리는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권리 또한 있습니다. 사회계약설 위에 만들어진 국가들은 이런 소원과 정체성을 품은 귀중한 개인을 존중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은 국가의 정치를 국민이 투표로 정한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 깊은 소원을 펼치며 살 수 있는 장을 국가가 제공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무척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루어지기 무척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을 가집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소원이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연한 소원을 국가가 외면하고 소원 자체를 파괴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지 않았던 말도 안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에 저항하는 이들과 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국가가 죽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항쟁을 벌이는 이들을 국가가 탄압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순간을 지나 이제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소원을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왔습니다. 여전히 몇몇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데 많은 힘이 들지만, 조금씩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세상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이지만, 오랜만에 별에 기도해 봅니다. 조금의 변화가 계속되어 언젠가는 모든 이들이 소원이 이뤄지지는 못하더라도 무시되지는 않는 세상이 찾아오기를. 모두가 그 소원을 바라는 세상 속에서 행복을 바라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느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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