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저항의 계승, <판>

계룡 강독사, 남사당놀이, 민중미술

by baekja

웃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있을까요? 힘든 날에는 억지로 웃기만 해도 힘이 난다고 합니다. 저도 웃음을 좋아합니다. 제가 웃는 것도 좋아하고, 누군가를 웃기는 것도 좋아합니다. 한 번 왔다가는 삶, 즐거움과 웃음이 가득하다면 그거야 말로 좋은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웃음을 찾다보니 혼자 재미를 찾을 때는 정신 나간 사람, 남을 웃길 때는 광대라 불립니다. 지금에야 광대가 사람을 잘 웃기고, 웃기기 위한 기술을 잘 구사하는 사람 정도이지만, 예전에는 무척 낮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었습니다.


해학은 문학의 기본 미적 범주에서 골계에 속합니다. 현실과 이상이 융합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에 가까운 것. 다른 말로, 힘든 현실에서 현실의 무언가를 끌어다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해학은 웃음 속에서 현실과 이상을 뒤섞기도 하기에 우아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골계는 기본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아름다움입니다. 힘든 현실에서 현실을 또 끌어다 쓰기 위해서는 그 힘듦을 중화하기 위한 웃음이 필요한 법이죠. 이 웃음이 유발되기 위해서는 웃는 자가 웃음의 대상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야만 합니다.


뮤지컬 <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이끌어냅니다. 조선 후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지만, 그 말들에는 분명 현실과 맞닿은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넘버 <어둠의 마법사들>에는 뇌물과 계엄, 탄핵에 관한 말들을 명시하며 제시하고 있죠. 기득권층으로 인해 고통 받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웃음을 자아냅니다. 이 웃음은 돈을 내고 온 관객과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배우의 관계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웃음입니다. 만약 배우가 관객보다 한참 높은 사람이라면 그냥 웃지 못하고 저들이 왜 저러는지 의중을 파악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겠죠.


옛날의 광대들, 그리고 <판>의 배우들은 그 자체로, 존재로 웃긴 것이 아닙니다. 웃긴 말을 하고, 웃긴 행동을 하며 웃긴 상황을 만듦으로써 웃깁니다. 우습지 않은데 우습게 보이거나 그렇게 나타내어줌으로써 생기는 웃음. 그것이 주관적 골계입니다. 이 주관적 골계에서 사려 깊은 따뜻함을 준다면 해학, 비판의 의미가 들어간 만들어낸 웃음이라면 풍자로 구분됩니다. 둘은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으나 사용될 때 지배층을 비판하여 민중 혹은 백성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따뜻함을 준다는 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해학에 풍자를 더한 <판>은 뮤지컬의 제목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을 강조합니다. 판은 예로부터 이야기꾼 혹은 연행자, 청중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단순한 무대가 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삶이 얽히고설켜 모두가 어우러지는 곳이 판이었습니다. 다만, 이야기나 공연의 연행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대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런 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을 즐기는 한마당 같은 공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보는 것이 익숙해진 사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듣는 것이 중요한 옛날의 이야기판은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구전은 기록으로 대체되었고, 문학적 담화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로 대체되어가는 이 시기에 우리는 상호작용 속에서 삶을 맞부딪치는 판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판>은 그 이야기판을 재현합니다. 뻐꾸기 불로 배우(이야기꾼)와 청중이 같이 호흡하고, 공연 중에 넣는 추임새는 공연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로 극장 내에서는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부숩니다. 중간에 관객들이 선정한 단어로 만들어내는 전기수 호태의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이야기판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인 즉흥성을 여실하게 드러냅니다. 관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즉흥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판>은 이야기판의 새로운 계승이자 재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도대로 구성되고 이야기가 어느 정도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이야기판의 성격이 강하게 두드러짐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넘버와 대사를 구현해야 하는 뮤지컬의 특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판>의 주인공 달수와 그의 조력자 호태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전기수 “기이한 이야기를 하는 늙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조수삼의 《추재집秋齋集》에 실린 한 기사의 제목입니다.

“한 늙은이가 동대문 밖에 살았다. 그는 언문패설을 구송하였는데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같은 것이었다. 첫째 날은 첫째 다리에 앉아서, 둘째 날은 둘째 다리에 앉아서, 셋째 날은 뱃고개에 앉아서, 넷째 날은 향굣말 입구에 앉아서, 다섯째 날은 대사동 입구에 앉아서, 여섯째 날은 종로 앞에 앉았다. 이렇게 거슬러 오르다가 칠일 째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래로 오가며 그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한 그와 같이 한다.

글을 잘 읽어서 청중이 겹겹이 둘러선다. 긴장되는 구절에 이르면 소리를 내지 않고 멈춘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음 순서를 듣고 싶어 다투어서 돈을 던진다. 이것을 일러 요전법(邀錢法: 돈을 요구하는 법)이라고 한다.”

언문패설은 한글로 된 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위 글을 통해 조선 후기에 한글 소설을 낭독하여 돈을 버는 전문 직업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냥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호방한 호걸을 흉내 내고 아름다운 미인의 자태를 꾸며냈으며, 누군가는 실감나게 연기를 하다 이야기 속의 인물과 동일시되어 청중에 의해 칼을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연기를 잘하는 이는 부호들의 집에 불려가 연행을 하기도 했고, 위의 전기수처럼 이야기판이 벌어지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낭독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기수는 일단 글을 읽어야 했기에 몰락한 양반인 경우가 많았으며, 마지막 전기수라고 볼 수 있는 정규헌 선생님의 경우도 아버지가 글을 잘 읽는 선비였습니다. 정규헌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강독사’로 지정되어있던 충청남도 무형유산은 해제되어 이제 전기수의 전통은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지금에는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기에 글을 대신 읽어 이야기해주는 전기수는 설 자리가 사라진 것이죠. 반대로 말하면 글을 모두가 읽을 수 없었으나 이야기를 찾는 사람이 많았던 조선 후기에는 전기수가 전국에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근래 규방에서 경쟁하듯 일로 삼는 것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이 패설이다. 날마다 더하고 달마다 증가하여 그 종류가 천백가지다. 쾌가(儈家, 서점)에서 이것을 깨끗이 필사하여 빌려주고 그 값을 받아 이익을 챙긴다. 부녀들은 견식이 없어 비녀나 팔찌를 팔아서 또는 빚을 구해와 서로 다투어 빌리러 온다. 그리고 책을 돌려주기까지 긴 날을 소일한다.”



조선 정조 체재공의 《번암집樊巖集》에 실린 것으로 가장 먼저 경쟁하듯 일로 삼았을 정도로 자주 봤던 것이 패설, 즉 소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대부가의 부녀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 글에 보이는 기득권의 비판적인 태도와는 별개로 소설이 매우 유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기수의 수요가 생겨난 것이겠죠.


<판>에서는 소설을 필사는 ‘덕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필사가 가능한 글을 읽는 여성 평민이라는 점에서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쾌가에서 필사하고 빌려주어 이익을 챙긴다는 이야기를 보아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이는 필사를 한 끝에 자기만의 새로운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 종류가 천백가지다”라는 말에서 무척 다양한 소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사를 하던 중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여 소설을 만들어낸 이름 없는 소설가들이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 인기 있는 고소설의 이본異本이 수백 종에 이르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책을 빌리고, 필사하는 이가 상주했을 쾌가는 다른 말로 ‘책을 빌리는 가게’라는 뜻에서 ‘세책가貰冊家’라는 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세책가에서 책을 대여하는 비용도 비싸 세책가의 책을 다시 필사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세책가는 <판>에서 ‘춘썸플레이스’로 표현되며 하나의 세책가를 넘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판으로 일컬어집니다. 이런 문화는 고소설이 사라지고 신소설이 등장한 일제강점기까지도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한글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문제시 되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전기수 일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저항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1960년대 이후 전기수는 말 그대로 전설 같은 존재로 남았습니다.


극에서 묘사하는 전기수(달수, 호태)는 분명 실제 전기수와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실감나게 낭독하여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는 점. 화려한 언변과 당당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읽는 기술 또한 돈을 버는 방법이었기에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 등. 세세한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명망 있는 전기수는 기득권층의 초대를 받아 낭독했기에 생각보다 저항의 의미가 강하지는 않다는 점과 마을마다 한명씩 있어서 생각보다 떠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점은 큰 차이입니다. 넘버 <그런 이야기>에서 자유를 얻은 전국 팔도를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지극히 일부 전기수의 이야기였던 것이죠.


<판>에서 중요한 두 요소 해학과 저항 중 해학은 과거의 전기수에서 찾을 수 있지만, 저항은 과거의 전기수에서 찾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팔도 유랑의 부분도 그러하고요. 그 부분은 <판>이 전기수 이야기를 그냥 낭독이 아닌 하나의 공연으로 만들면서 참고한 연행의 부분들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공연의 처음부분에 나오는 버나, 덕이가 쓴 <여록전>에서 나오는 여록이라는 여성 어름산이(줄타기꾼), 인형극을 통한 서사의 전개, 탈을 활용한 1인 다역 연기,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풍자와 저항의 분위기, 팔도 유랑까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국가무형유산이 바로 ‘남사당놀이’입니다.


남사당놀이는 안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남사당패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벌일 때 하는 놀이입니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고, 구술 전승에 따라 1900년대 초반부터는 존재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남사당패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광대로 한 패거리에 40~50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이 패거리 안에 있습니다.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나 밑의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서 꼭두쇠를 바꿀 수는 있었습니다. 곰뱅이쇠는 마을에 남사당놀이를 하기 위한 허가를 받고, 밥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해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뜬쇠는 각 공연분야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그 밑에 가열, 가장 낮은 사람이 삐리였습니다. 저승패는 예능을 더 하지 못하는 노인을, 등짐꾼은 짐을 나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전설적인 꼭두쇠 중에 ‘바우덕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본명은 김암덕, 뛰어난 기량으로 15살의 어린 나이와 여자라는 조건에도 꼭두쇠가 되었습니다. 소고 다루는 솜씨가 특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경복궁에 불러들였습니다. 이때 바우덕이는 경복궁에서 소고와 선소리로 뛰어난 공연을 펼쳐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았습니다. 이 바우덕이는 덕이가 쓴 <여록전>의 여록의 모티브일 뿐만 아니라 남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회에서 자기의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간 여성이라는 점에서 ‘덕이’라는 인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합니다.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에게는 모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무 마을에서나 자유로이 공연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연에 앞서 마을 앞에서 공연을 하며 관심을 끌고, 마을 지도자에게 허락을 맡고 나서야 마을 안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이마저도 공연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숙식만 해결 받고, 예쁘장한 삐리들을 매춘하여 돈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공연은 저녁부터 시작하여 횃불을 키고 밤새도록 이어졌습니다. 풍물, 버나, 살판,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순대로 공연이 벌어졌습니다.


풍물은 우리가 잘 아는 농악입니다. 하지만, 지역적 성격을 띠는 다른 농악들과는 다르게 팔도 유랑을 하다 보니 범지역적인 성격을 띱니다. 쇠는 경기·충청의 웃다리가 소고를 치며 상모를 돌리는 벅구는 경상도가 장고와 북은 전라도 출신이 많습니다. 다만, 근거지가 안성이어서 가락은 역동적인 경기·충청의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합니다.


버나는 쳇바퀴나 대접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것이며, 살판은 땅재주라고 불리며 현대 체조의 마루와 비슷합니다.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어름은 높다란 외줄을 어름산이가 타는 것입니다. 남사당놀이에서 여성이 있던 경우가 정말 가끔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어름산이였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곡예의 핵심은 공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릿광대(매호씨)와 소리를 주고받으며 재담을 하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곡예와 재담이 섞이면서 조금 더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것이죠.


다섯 번째 마당은 덧뵈기입니다. 덧뵈기는 ‘덧(곱)본다’는 뜻으로 가면을 나타냅니다. 일종의 탈놀음이나 각 지역에 분포, 전승되어오는 탈춤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적고 내용도 네 장면으로 간소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춤사위가 탈춤에 비해 적고 대신에 마임과 재담이 더 풍부하여 사회 풍자가 짙습니다. 4마당 구성으로 첫째 마당(마당씻이)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 마당(옴탈잡이)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 마당(샌님잡이)에서 내부의 모순을 없애고, 넷째 마당(먹중잡이)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셋째마당의 샌님은 낮은 신분의 말뚝이에게 조롱당하는 양반으로 언청이로 묘사되기에 양반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덧뵈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마당은 덜미입니다. 꼭두각시놀음이라 불리는 덜미는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것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한국에 하나뿐인 민속인형극으로 남사당놀이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대잡이와 그를 보조하는 대잡이손, 악사이면서 등장인물과 대화를 하는 산받이가 덜미를 이끌어갑니다. <판>에서 등장인물과 대화하면서 악기도 연주하는 산받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판>이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뮤지컬이고, 그 무대 위에서 인형극을 사용한다면 남사당놀이의 인형극은 덜미포장이라는 검은 천으로 싼 임시 무대를 만들어 거기서 인형극을 합니다.


덜미는 크게 박첨지 마당과 평안 감사 마당이라는 두 개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마당의 주인공은 모두 박첨지입니다. 박첨지 마당은 박첨지의 가족사로 늙수구레한 박첨지가 수난을 겪다 첩(덜머리집)을 얻어 본처(꼭두각시)와의 파탄도 생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금강으로 떠나는 본처에게 재산을 갈라주는 과정까지 나오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해학을 주는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안 감사 마당은 평안 감사가 횡포로 꿩 사냥을 나갔다가 어이없게 죽고, 박첨지가 상좌중 2명과 함께 절을 짓고 허뭄으로써 마무리합니다. 넘버 <평안 감사 새 사냥>의 모티브로 보입니다. 넘버에 “간만에 사냥을 나왔으니까 몰이꾼도 하나 사들이자 용맹하지만 현명하지는 않은 놈으로!”라는 대목은 덜미 대사에 몰이꾼을 빨리 사들이라는 대사와 연결됩니다. 이는 평안 감사를 통해 기득권층을 노래로 강렬하게 비판한 <판>의 넘버와 평안 감사를 해학적으로 표현하며 기득권층을 풍자한 덜미가 모두 저항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앞의 네 마당에서도 재담을 통해 웃음을 주는 곡예는 드러나지만, 뒤의 두 마당, 덧뵈기와 덜미를 통해 남사당놀이의 저항적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양반 주인과 저항하는 하인, 늙은 부부와 첩, 속세의 쾌락에 빠져 버린 승려, 끝없는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민중과 같은 각각 다른 사회계층의 전형적인 한국 사람을 대표하는 등장인물들은 목소리를 낼 수단이 없는 민중 대신 문제 제기를 해주었으며, 민초들의 소망을 대변하여 세상에 대한 불만을 대신 쏟아내 주었습니다.


<판>에 담긴 해학과 저항의 정신은 남사당놀이와 잘 융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과 남사당놀이의 특징이라면 남사당놀이가 해학 속에 저항을 드러낸 데 비해 <판>의 결말 부분에서는 해학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과 차이 나는 이상을 향한 비장미를 통해 저항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은 넘버 <새가 날아든다>에 잘 드러납니다.




넘버 <새가 날아든다>는 남도 민요 <새타령>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국의 어려운 고사와 다양한 어휘를 통해 새의 생태를 표현하고, 다양한 새소리를 이야기하는 <새타령>은 남도 민민요에서도 널리 알려진 노래입니다. 하지만, 남도 민요의 <새타령>에는 그 어떠한 저항 정신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새타령>에 저항정신이 더해진 것은 판소리 <적벽가>에 <새타령>이 들어가면서부터입니다. <적벽가>에서 조조가 패퇴하고 도망칠 때 오림에서 원한을 품은 병사들이 새가 되어 노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조는 폭정을 하는 기득권층을, 병사들은 그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피지배층이라 해석 가능합니다. 이는 《삼국지연의》에는 없는 내용으로 판소리의 풍자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노래기도 합니다. 이 노래를 바탕으로 <새가 날아든다>를 만들었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담긴 비판적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관람객들을 피지배층의 상징인 뻐꾸기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피지배층으로서 연극 안에 들어와 몰입하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이처럼 뮤지컬 <판>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통문화를 끌어와 해학과 저항의 정신 속에서 현대의 상황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근현대시기에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판이 최초가 아닙니다. 오히려 <판>은 근현대시기에 있었던 이전의 시도를 이어받아 새롭게 계승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재정부에 대한 반발을 민족주의의 발로로써 저항하던 시기 1980년대의 민중미술이 바로 뮤지컬 <판> 자체에 많은 영향을 줬을 겁니다.


원래 무시 받고, 천대 받던 민속 전통문화는 1958년 처음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61년부터 매년)를 기점으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964년 국가무형유산 제도가 성립되면서 제도권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굿, 탈춤, 농악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운동권에서는 민속이 지배층의 문화가 아닌 피지배층의 문화였음에 착안해 적극적으로 이 문화를 저항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대학들의 봄 축제가 대동제라고 불리거나 이화여대에서 국가무형유산인 영산줄다리기를 여전히 축제 때하고 있는 것은 이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삶과 유리된 모더니즘 미술에 지쳐 노동자, 농민들과 같은 피지배계층의 삶으로 들어가 미술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79년 결성된 ‘현실과 발언’그룹은 그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피폐한 물질만능주의와 소비문화의 부정적인 측면 등 급속히 성장한 한국 사회의 이면裏面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정치적 발언보다는 제도권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들은 아직 사회에 뛰어들기보다는 전시회 위주의 활동만 펼치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크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작품에서는 불화의 지옥도나 시왕도, 민화의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저항에 전통을 섞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광주에서 1979년 설립된 ‘광주자유미술인협회’, 1982년에 설립된 ‘임술년’, 1983년에 설립된 ‘두렁’, ‘시민미술학교’, 1985년에 설립된 ‘서울미술공동체’는 전시를 넘어 참여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민중미술은 운동으로 변하였고, 부패한 정치가, 농촌과 도시 근로자의 현실, 남북 분단 상황, 민족을 주제로 하는 역사의 재해석, 미국의 신제국주의와 한국의 신식민지 상황 등을 다양하게 다루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민중에게 다가가는 것을 정부가 가만 놔둘 리 없었습니다. 1985년 7월 아랍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은 강제 철거되었고 몇 작품은 압수되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민중미술’이라는 명칭이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탄압은 미술가들을 한곳에 뭉치게 만들었고, 다양한 단체의 다양한 미술가들이 모여 1985년 11월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됩니다. 1988년 12월에는 예술 분야가 모두 합쳐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창립되어 그 산하에 문학, 미술, 연극, 음악, 영화, 춤, 사진, 건축, 굿 등 모두 9개 민족예술위원회를 두었습니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민중미술은 대형 괘불의 전통을 빌려 걸개그림을 다수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벽화는 정부에 의해 지워지기 일쑤였기에 대안으로 걸개그림을 그린 것이죠. 이러한 행동 속에서 민중미술은 지배문화의 전복을 꾀하고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투쟁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민중미술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개인의 이야기를 쉽게 미술로 들여오게 되면서 사그라졌습니다. 특히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이 열리면서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을 끌어들여 저항의 정신을 내비치고, 미술을 통해 전통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으며 미술과 삶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민중미술은 분명한 의미를 가진 운동이기도 합니다.




<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의 한 장르를 통해 전통의 요소들을 섞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그를 통해 현실의 비판을 이끌어냅니다. 또한, 전통과 현실을 오가는 와중에 예술과 삶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어트리고, 그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합니다. <판>이 가진 해학과 저항의 정신은 전기수, 남사당놀이, 판소리, 민중미술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세대를 거쳐 전승된 끝에 현대에 새롭게 계승된 것입니다.


한국의 미를 이야기할 때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과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라는 공간과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전기수는 문맹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는 문화이며, 남사당놀이도 연행판의 소멸로 인한 한계가 명확한 문화입니다. 판소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는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현대의 대중가요나 당장의 뮤지컬 넘버와 인기를 비교하기에는 무리입니다. 민중미술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미술운동이죠. 이 모든 전통이 담은 시대성을 현재에 구현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어 일상 속의 이야기로 풀어낸 뮤지컬이 있습니다. 모두를 끌어 모아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판 위에서 해학과 저항을 웃음과 울음으로 펼쳐내는 <판>은 지금의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하나의 요소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