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강과 바다가 묻어난 한국의 푸름, 염색장

국립무형유산원 국외교류전 <푸름의 대화>

by baekja

겨울의 잿빛 공기 속 화려한 조명들이 거리를 비춥니다. 형형색색의 조명들은 색을 잠시 잊고 살았던 도시의 사람들에게 들뜬 분위기를 선물합니다. 지금 인류는 어느 때보다 많은 색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자연의 재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학 재료를 통해 색에 이름을 끝도 없이 붙여내고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지는 색은 사실 일반인 입장에서 이전에 있던 색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이들이 이름을 다르게 붙이고, 과학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사실 이처럼 색은 어떤 정해진 규칙이나 규범이 아닙니다.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변화합니다. 인류의 역사에 관해 가장 많이 알며,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현대이지만, 여전히 색의 의미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입니다. 암만 과학적 규칙에 따라 한 색에 이름을 붙여도 누군가의 인식에 그 색은 다른 색일 수 있습니다. 색은 이처럼 사회적 인식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회적 인식만 남는다면 색 자체에 이름조차 붙일 수 없어 너무 정신없는 상태만 유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비슷한 시대, 지역에서는 나름 거의 같은 ‘색’을 공유했습니다. 그것이 문화로 인식된 색입니다.


한국 문화에도 색은 있습니다. 黑(검정), 白(하양), 赤(빨강), 黃(노랑), 靑(파랑)의 오방색이 대표적입니다. 이 오방색은 오랜 역사에서 한반도의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특히, 하양과 파랑은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색입니다. 《삼국지》 <부여전>에 이미 흰 옷을 즐겨 입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시대까지 서민들이 흰 옷을 계속 입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흰 옷을 즐겨 입었던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딱히 권장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흰 옷을 입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는데 첫째, 염색이 비싼 기술이었다는 점. 둘째, 말 그대로 그냥 흰 색을 좋아해서. 파란색은 이와 달리 이유가 좀 명확합니다.


대륙 기준 한반도는 동쪽에 있습니다. 오행에서 동쪽은 파란색을 의미하죠. 오히려 서쪽을 의미하는 하얀색보다 사상적으로 한반도에 잘 어울리는 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파란색을 고려부터 적극 권장하기 시작합니다. 고려의 귀족층이 가장 사랑했던 색은 자주색이었습니다. 이걸 고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하얀색 옷을 입는 것을 막고 파란색 옷을 계속 입게 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미 충렬왕과 공민왕 때 올라왔습니다. 이런 청색 옷을 권장하는 기조는 조선까지 이어져 세종 때에는 유생들도 청색을 입게 권장하였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파란색은 점점 한국인이 선호하는 색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선호가 완전히 정착되어 《경국대전》기준 가장 많은 염색장은 청염장(30명)이었습니다. 이는 다음으로 많은 홍염장(12명)과도 제법 수가 차이가 났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이 파란색이 무척 비싼 색이어서 일반인들이 잘 쓸 수는 없었습니다. 관제 염색이 중심이었으나 사치 풍조가 심했던 연산군 때 염색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염장(私染匠)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중종 때는 공염장(公染匠)을 많은 부분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발전한 민간 염색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쇠퇴하였다가 영·정조 시절 발전하였고, 정조 대에는 관제 장인들을 전부 폐지하면서 민간 염색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숙종, 영조 때에는 흰 옷보다 파란 옷을 입도록 권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효과를 거둬 적어도 지배 계층에서는 파란 옷을 즐겨 입기 시작했습니다. 정조 대 청염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신윤복의 풍속화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혜원전신첩》에 있는 여러 그림을 보면 양반들의 창옷, 도포나 기생들의 치마가 푸른색으로 염색된 것을 쉬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덕무는 집안 재정의 도움을 위해 꼭 염색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부녀자가 알아두어야 할 필수적인 기술로 꼽기도 했습니다. 보통 무명천에 비해 청염을 한 무명천이 약 4배 정도 비쌌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좌 : 주유청강(舟遊淸江), 우 : 청금상련(聽琴賞蓮)


이렇게 발전한 청염은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일반 서민들의 혼수품이나 중요한 날 입는 옷에 사용되는 정도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쪽 앙금 새우젓 단지 하나가 쌀 한 가마니와 교환될 정도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1960년대 화학 염료의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전통 천연 염색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때 사라진 천연 염색은 1970년대 민속학자들과 마지막까지 염색을 했던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되었고, 2001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염색장은 화학 염료로 하는 염색과 달리 1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파란 빛을 만들어내는 쪽의 파종과 재배 기간에 맞추어 염색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늘의 맑음, 강의 깊음을 담아낸 파랑을 갈색의 대지에서 뽑아내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1~2월, 조개를 채취하고 황토 가마에서 조개를 구워냅니다. 조개는 불에 의해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됩니다. 이 가루를 체에 걸러 곱디고운 소석회를 만들어냅니다. 조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조개가 내내 품고 있는 바다의 푸름은 석회에 그대로 담깁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3월, 쪽의 파종을 시작합니다. 재배판에서 한 달 동안 고이 길러 팔뚝 길이에 가까워지면(20cm) 본밭으로 옮깁니다. 쪽은 대지의 양분을 아낌없이 빨아들이고, 강의 시원함과 하늘의 자유로움을 머금으며 자랍니다. 이렇게 자라난 쪽이 40~50cm 자라난 7월, 모아둔 모든 것들을 꽃으로 펼쳐내기 전에 잘라냅니다.


잘라낸 쪽은 물을 가득 넣은 항아리에 담아 2일 정도 쪽물을 빼냅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냄새는 역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먼지를 다 냄새로 뱉어내는 것입니다. 쪽대를 건져내고, 쪽물에 석회가루를 풉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젓습니다. 노란빛을 품은 탁한 물은 꽃을 담은 거품을 내뱉으며 쪽이 품었던 마지막 바람을 펼치고 나서야 파란빛으로 변합니다.



얼마간 기다려 쪽 앙금(泥藍)이 물밑으로 가라앉으면 제 마음까지도 비춰낼 맑은 물이 남습니다. 그 맑은 물을 걷어냅니다. 세상을 모두 푸름으로 물들일 듯한 쪽 앙금에서 마지막 남은 물까지 짜냅니다. 여기에 다시 쪽대로 만든 잿물을 붓습니다. 일주일에서 이주일 간의 발효를 거치면 쪽의 새로운 꽃이 피어납니다. 쪽으로 만든 염액 ‘꽃물’이 완성됩니다.


짙고 짙은 푸름을 발하는 꽃물에 잿물로 깨끗이 삶아낸 천을 담가 봅니다. 길게 이어진 천을 조금씩 꽃물에 담그면 몇 천 년을 이어 온 푸른 역사가 이 천에 묻습니다. 자유, 순수, 맑음, 깊음, 시원함 등등. 그 모든 이야기와 형용사들이 천에 적셔지고, 천은 세상을 덮는 하늘이 되기도, 대지를 길게 적시는 강이 되기도,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름을 품은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천을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맑은 하늘이 보이고, 긴 영산강이 지나 바다로 이어지는 나주입니다. 따뜻한 햇살과 푸른 물이 아주 많이 필요한 쪽은 나주와 아주 잘 맞는 식물이었습니다. 남도의 쨍한 햇빛, 자주 일어나는 영산강의 범람, 바다에서 흘러들어온 풍족한 조개까지 쪽 염색을 하기 정말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부는 아닙니다. 영산포라는 큰 항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장시가 만들어졌습니다. 목화와 뽕나무를 다수 재배하여 근대까지도 잠사(蠶絲) 산업이 성행했죠. 만들어낸 면포와 비단에 쪽빛을 물들여 판매하면 항구를 통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염색업에 뛰어들었고, 그 흔적이 지금 국가무형문화유산 염색장을 통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끊어질 듯하였으나 끊어지지 않은 푸름은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도 한국의 푸름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윤동주 <소년> 中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中



한국의 쪽염이 아름다운 것은 분명하나 그것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미 중 하나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습니다. 쪽염과 같은 청염은 전세계 곳곳에서 갖고 있는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의 청염은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블라우드루크(blaudruck)'라는 이름으로 다섯 나라의 청염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청염은 처음엔 ‘대청’이라는 식물로 이뤄졌습니다. 기원전 800년 경 파란색으로 염색한 천 조각이 할슈타트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청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13세기까지 채도가 높은 푸른색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13세기부터 대청의 발효법을 알아내어 본격적으로 청염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15세기부터 현재의 블라우드루크에 쓰이는 ‘인디고페라(통칭 인디고)’라는 식물을 염색에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인디고페라는 대청보다 발색은 훨씬 좋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습니다. 이것이 해결된 것은 아메리카 탐험 이후였습니다. 아메리카에서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해 값싼 인디고페라를 들여오기 시작했고, 17세기 후반에는 인디고페라가 대청을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인디고페라를 이미 염색에 쓰고 있던 서아시아에서 염색법을 배워 유럽의 기술과 합치기 시작했고, 17세기 후반 독일의 노이호퍼 형제가 이렇게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염색법에 자신들의 기술을 넣어 ‘네덜란드 인디고 염색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블라우드루크의 기원입니다.


이 염색법은 유럽의 독특한 염색 장인 제도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유럽에서 염색 장인인 ‘페르버마이스터(Ferbermeister, 독일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도제로 장인 밑에 들어가 배웁니다. 도제를 수료하면 염색 직인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시험에 통과해서 염색 직인이 되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염색 기술을 배웁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염색 장인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이 시험에서 통과하면 길드에 소속된 염색 장인이 됩니다.


1950~1960년대 이후 싸고 빠르게 염색할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나면서 위의 방식들로 전통 공방들은 거의 사라졌고, 집안의 소중한 기술로서 오랜 전통을 유지하는 공방도 오스트리아에 두 군데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북부에서 맑은 알프스의 하늘을, 다른 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남동부에서 노이지들러 호의 깊은 물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블라우드루크에는 문양이 들어갑니다. 방염풀을 문양을 담은 나무 블록에 묻혀 천에 찍고 2주간 말립니다. 말린 천을 넣기 전 인디고 염료와 석회가루, 잿물을 섞어 만든 염액을 미리 저어둡니다. 저어둔 염액은 어두우면서 파란, 밤바다의 색깔을 띕니다.


말린 천을 직물 틀에 겁니다. 밤하늘의 별을 닮은 틀(sternreifen)에 태초에는 있었을지 모를 하얀 하늘이 걸립니다. 별에 걸린 천이 밤바다에 적셔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하늘에 적셔진 바닷물은 처음엔 초록색이었다가 이내 파란색으로 점점 변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우리가 아는 밤하늘의 색을 가진 천이 만들어집니다.

이후 방염풀을 세척하면 방염풀이 있던 자리에 하얀 문양이 생겨납니다.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하얀 문양은 오스트리아의 동식물, 상징들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자연과 인문학적 이야기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것이죠.


이 블라우드루크로 담아낸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움은 1800년대 중반 이후 사치규제법이 폐지되고 나서 늘 오스트리아의 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입고 있는 옷으로 유명한 알프스 지방의 전통 복장 디른들(Dirndle)이나 오스트리아 남동부의 전통 복장 피아타(Piata)는 모두 블라우드루크로 염색된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의 일상에서 푸름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푸름에 담긴 오스트리아의 자연, 역사, 문화도 늘 삶의 곁에 있었습니다.


디른들과 블라우드루크로 염색한 일상용품들


오스트리아에서 100년이 넘은 두 공방, 바그너 염색공방과 코 염색공방에서는 파란색에 생명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매번 염색을 하지만, 염색할 때마다 파란색이 달라진다면서요. 그 생명에는 오스트리아의 밤하늘을 비롯한 자연, 오스트리아의 사람, 오스트리아의 감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파랑 ‘blau' 또한 그들의 삶을 노래하는 데 쓰였습니다.



저녁의 푸른 날개가 아주 살며시

초가집 지붕과 검은 땅을 건드린다

곧 별들은 지친 자의 눈썹에 둥지를 틀고,

서늘한 방에는 겸허함이 찾아들 것이며,

천사들은 살짝 고통 받는 연인들의

푸른 눈에서 걸어 나올 것이다.


게오르크 트라클 <고독한 사람의 가을> 中



한국의 푸름에서는 찾기 힘든 목가적인 분위기와 그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이 인상적입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자연과 역사 모두 다릅니다. 자연히 담아내는 푸름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블라우드루크 천은 화려하고 직설적입니다. 그들의 자연, 역사, 문화를 강렬하게 뽐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쪽염 천은 그윽하고 깊습니다. 한반도의 자연, 역사, 문화를 은은하게 흘립니다. 두 국가의 푸름은 우열은 가릴 수 없으나 차이는 분명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쪽염은 한국만의 고유한 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다!’라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2000년이 넘는 한국의 염색사 속에서 한국의 파랑을 이어온 것은 한국의 쪽염입니다. 한국의 파랑이 한국의 하늘, 강, 바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온 색으로서 기능하는 동안 면면부절 그 색을 표현해온 한국의 쪽염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전통을 이어온 쪽염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에 사용되어 현대의 생각과 삶을 담아내기 위해 변모하고 있습니다. 전통공예의 염색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로도 사용되어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동시대의 기술이자 예술로써 과거를 현대로 잇는 역할 뿐 아니라 현대에서 미래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늘 그대로 있을 한반도의 자연, 늘 이어질 사람들의 삶을 색으로 담아낼 염색장에 대한 푸른 기대감을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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