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체험(時間體驗)’으로 말하는 자유로운 사랑의 삶

by 송영주

40년 가까운 ‘어쩌다 교직생활’을 마치고 자유로운 퇴직자의 시간을 보낸 지 6개월이 넘어간다. 퇴직을 하면 뭐할 것인가를 무한한 주제로 욕심스럽게 생각해 낸 것들이 많았다. 운동, 여행, 독서, 글쓰기, 영화감상, 집 가꾸기, 그리운 이들과의 만남 등, 이건 마치 자유를 속박당한 사람이 구속이 풀어지면서 한풀이 마냥 쏟아내는 욕망의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6개월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나 이렇게 지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의 대표 목록은 아직 없다. 그래서 깨어있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짚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잠자기와 공치기(연습장)였다. 공치기는 회원권을 끊었으니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의무감이 작동했을 것이므로,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부여한 것은 잠자기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과 게으름과도 상통할 수 있으니, 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긴 속박의 세월에서 가장 원했던 것이 바로 이 ‘풀어짐’이었다고 하면 이 잠자기는 당당히 가장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퇴직 생활의 대표 목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時間)은 인간 존재와 삶의 여건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공평한 조건이다. 물론 공간(空間)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러나 공간은 시간에 비해 덜 공평한 면이 있다. 공간은 사회적으로 자신의 지분을 넓히거나 질적 개선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지위 고하와 권력 여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균일하게 동량이 주어진다. 몇 년을 살도록 허용 받았는지는 인간 능력이 아니므로 수명 부분은 제외하고 하루 24시간을 전제로 말해 본다. 생명을 위한 공기, 의식주, 사회적 관계 등이 여기에 더 추가될 수 있지만, 이는 인간 삶의 가장 기저가 되는 ‘시간(時間)’의 후순위로 보인다.

이러한 시간에 대하여 이미 철학자들은 많은 물음과 다양한 사유를 해 오고 있다. 순수지속, 선험성, 인식과 의식 등의 다양한 사유 기재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시간 사유(時間思惟)를 설명하고 있으나, 시간은 객관적으로 흐른다는 절대성과 그 속에서의 의식적 체험 과정을 내비친 훗설(E.Husserl)의 현상학적 이해가 나의 생각과 가장 근접되는 면이 있다. 객관적으로 주어진 절대 시간 속에서 그 시간과 결합한 체험이 바로 삶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에게 동량인 시간을 어디에 어떤 대상에 가장 기꺼이 많은 양을 송출하는지 또는 상호작용하는지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이고 고유 색깔이 아닌가 싶다.

삶이 사회화되면서 욕망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욕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빠듯하게 정해진 시간을 나누어 할애하면서 살아간다. 당연히 욕망 순위에 따라 그 투자하는 시간의 양이 정해질 것이다. 하는 일 자체가 직접 욕망이 될 수도 있고, 그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윤택한 삶을 위해 욕망이 기획될 수도 있다. 다만, 하는 일 자체가 욕망이 아닐 경우는 불가피하게도 그에 대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겠지만, 일의 최상은 하는 일 자체가 욕망과 부합하는 경우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쉽게 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즐겁게 그 일에 몰입되면서 많은 시간을 투입하되 그 시간이 결코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 반면, 많은 사람들의 직장 일처럼 윤택한 삶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스트레스와 함께 긴 시간을 꾸역꾸역 보내야 한다.

시간의 기껍고 능동적인 할애는 ‘이성 간의 사랑’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사랑은 빠듯하게 부여받은 시간을 그 사랑을 위해 기꺼이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공유하게 한다. 서로 만나는 시간, 혼자서라도 연인을 생각하고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통화하는 시간,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도 ‘내 꿈 꿔’라는 말로 그 시간을 서로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그렇다. 사랑하는 대상이므로 그 사람의 시간을 모두 갖고 싶어 하고, 상대방도 그것이 더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이토록 한 사람의 시간을 뺏는 일은 없겠지만, 한 쪽만의 사랑일 경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전화통화도 만남도 과감히 거절할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므로 굳이 자신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는 ‘바쁘다’라는 핑계가 된다. 바쁘다는 것은 ‘나의 한정적이고 소중한 시간을 너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다. 실제로 거절 표현으로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은 ‘바쁘다’이고 이는 바로 자신의 시간 관리 문제로 해석된다. 마음은 없으나 거절이 불편한 경우라면 시간 이외의 방법으로 피상적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 선물이나 특정 지위 등의 부여는 가능하지만, 빠듯하게 부여 받은 소중한 시간은 마음 없이는 절대 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녀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 동료 간에도 깊은 사랑에는 반드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코스가 있다. 죽을 배달시키기보다는 직접 가서 끓여주는 행동, 전화 안부보다는 직접 가서 얼굴을 보는 시간의 할애, 택시 타고 오라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마중하는 일 등 많은 일들에서 사랑과 시간의 비례는 명확히 보인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져 나중에는 점차 잊힌다든가, 그 반대의 이웃사촌이라는 말들은 직접 만남이 바로 시간의 공유이고 이는 곧 사랑이라는 이치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워밍업의 과정이 있고, 서툰 단계를 거쳐야 매끄럽게 진행되는 수준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시간을 하고 싶은 어떤 일에 내어주고 있는가? ‘정말 관심이 있고 하고도 싶은데, 바빠서(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의 시간들을 도대체 어디에 쏟아 붓고 정작 하고 싶다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이치를 따지지 않고 나의 가장 많은 시간을 투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리라. 무계획적인 휴식, 퇴직 6개월의 시간을 무의미한 잠자기 수준에 많이 할애한 것으로 평가하여 한 것 없이 보냈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힘을 모으는 휴식으로 본다면 이는 매우 긍정적인 동력의 시간 투자인 셈이다.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좋아서, 해 보고 싶어서 하는 자발적인 독서, 글쓰기, 영화감상 등은 바로 이러한 워밍업 즉, 휴식의 시간 체험에 힘입어 이제 시작이 잘 될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동력이 필요하거나 그 동력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나, 이 또한 함께 가는 시간 체험 중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 제2라운드에서는 하고 싶은 일에 따지지 말고 그저 흘러가듯 시간을 맡기면 될 일이다. 24시간으로 세팅된 나의 시간, 깨어 있는 시간의 가장 긴 시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빨아들일 자유로운 일들이 이제 준비되어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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