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은 고요 속에 잠을 깬다. 동네 어귀를 따라 냇물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구불구불 논길 사이로 물 웅덩이는 살얼음으로 깊이를 보탠다.
햇살이 내리기 전 잠자리를 벗어났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살그머니 대문을 나선다. 사각사각 발자국 소리를 묻는다. 희뿌연 운무가 자욱한 골목길을 돌아 큰길로 접어들었다. 포장된 도로를 달려 차를 멈춘다.
동네는 조용하다. 두어 채 이어진 집에 개 짖는 소리만 가끔 들린다. 대나무 밭에 홰를 친 새들이 환영을 한다. 후드득 후득 불청객의 발걸음에 날개 짓으로 쉼터를 옮긴다. 참나무 사잇길을 따라 오르면 낙엽은 발에 차인다. 삭정이가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 위에 내려앉았다. 새 순이 돋는가 싶더니 어느새 맨몸을 만들었다.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숲은 빛을 원하는듯하다.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등산화 발길에 차이는 작은 돌은 정리된다. 하찮은 일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 뒤로 편함을 위한 일이다. 여느 때처럼 산은 많은 것을 안겨 준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정겹게 나누는 인사로 서로의 안부를 건넨다. 삼 주 째 비슷한 시간대에 만난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혼자 걷는 위안을 가져다주는 모양이다. 이른 시간에 용감하게 산을 찾는 모습에 건강을 응원한다.
산길은 간벌 작업으로 정리되어 있다. 참나무, 밤나무, 소나무, 아카시아 나무 등등 큼직한 등걸은 쉼터이자 아침저녁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연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람들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잘린 나무 중에는 주변 환경에 따라 분해가 되어 다시 숲의 일원으로 가는 모습을 보인다.
나의 이기심으로 자연의 순환을 거역하게 된다. 괜찮은 나무토막들은 온돌 아궁이를 데우는 연료 보급 창고다. 나무에게도 자연으로 순환할 자유는 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방해받을 뿐이다. 어쩌면 눈앞의 사욕 때문에 일그러지는지 모른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르지만 내 욕심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나 만의 공간에 생채기를 내었다.
맑은 공기가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능선 한가운데서 합강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는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곳곳의 받침대 나무가 낡고 삭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합강정에서 누려보는 풍경은 높은 낭떠러지를 먼저 안긴다.
삼국 시대를 거쳐 한국 전쟁에 이르면서 영토 확장과 무한한 자유를 위한 희생이 남겨졌다. 수많은 혼령이 깊은 물결과 함께 묻힌다. 그 옛날 개비리길 이야기를 찾아 애틋한 모정을 그려본다. 전망대 깊숙이 스며들던 꿈이 멀어진다. 산은 나에게 모든 것을 안겨 준다. 다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공간이다. 고통을 덜어 주고 여유를 갖게 해 준다. 나를 비우고 또 채워 준다. 이슬을 밟고 오른 산길이 우뚝 솟아 오른 햇살에 개운함이 맞선다.
멀리 기암괴석의 다양한 모양새를 눈에 새기고 한가한 자연 속에서 하루를 펼쳐 나간다. 힘이 넘친다. 시간이 넉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