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꾸역꾸역

#1

by Dean

밴을 구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돈 한 푼 없이 밴을 사서 개조하기로 마음먹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지 딱 3개월 만에 밴을 사무실 구석 주차장에 끌고 온 것이다. 무비자로 영국에 들어왔으니 개조할 수 있는 시간은 딱 3개월이 남은 거였다. 생각보다 밴을 구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개조쯤이야 그동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온 게 있으니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유학시절 때 일했던 신문사에서 편집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한인 민박집에서 일을 해 돈을 벌고 숙식도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는 돈과 일하고 남는 시간 등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 3개월이란 시간은 넉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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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일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약간의 창의성을 요하는 일이어서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할 수 있었고, 밴을 개조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더군다나 밴이 주차된 곳이 그곳의 주차장이었기 때문에 편집 디자인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이곳 주차장이 중요했던 것은 런던 근처에서 한 달에 10파운드를 내며 주차를 하고 자재들을 널어놓은 채 시끄러운 전기공구까지 마음껏 돌릴 수 있는 곳은 10년의 영국 생활 중에 그곳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조 후반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 주차장이 너무나 소중했다.


숙식을 해결하며 돈을 벌던 한인 민박집은 런던 한복판에 있었다. 일주일 중에 신문사 일을 하는 3일을 제외하고는 민박집 오전 일이 끝나고 지하철, 기차 그리고 버스를 갈아타며 한 시간 반이 걸려 신문사 주차장으로 가 밴을 개조했다. 민박집 일을 조금 빨리 끝내고 가면 11시 즈음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조를 시작한 12월의 영국은 해가 4시도 되기 전에 졌다. 주차장은 불빛이 거의 없어서 개조 작업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되질 않았으며 춥고 어두운 곳에서 작업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2017년 영국의 겨울은 기록적으로 추웠으니 개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더디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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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정리와 단열 공사가 끝나고 슬라이딩 도어에 창문을 하나 만들고 나니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신문사 일과 민박집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너무나 더딘 밴 개조 작업으로 초조하게 스트레스를 받던 나에게 더 큰 걸림돌이었다. 가뜩이나 개조 하루 하려면 왕복 세 시간을 이동해서 겨우 2~3시간 작업을 하는데 신문사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 일을 시키고, 민박집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군대에서 조차 당해본 적 없는 꼰대질을 해대고 있었으니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은 창문들만 다 달고 내부 인테리어만 대충 끝낸 뒤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나 혼자 살 캠퍼밴인데 대충 만든 들 어떠하리.

신문사와 민박집 사장에게 1월 말에 떠나겠노라고 알렸다.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혼자서 잘해보라고 얘기할 때에는 복수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짜릿했다. 밴은 그전까지 완성되지 않을 거라는 게 확실했지만 1월 말에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홀가분해졌고 스트레스마저 다 날아간 느낌이었다. 신문사의 엄청난 업무와 민박집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이상한 행동들은 여전했지만.


민박집의 일은,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제외한다면, 너무나 재미있었다. '나에게 이런 성격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숙박객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건네고 농담을 던지며 재미있게 어울렸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밴을 개조하는 시간보다 밤에 민박집 부엌에 앉아서 민박집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맞았다. 이렇게 떠나기엔 너무나 아쉬웠지만 오롯이 목적은 캠퍼밴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018년 1월이 되자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밴은 여전히 미완성이었지만 그냥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던 2018년 1월 초 어느 날, 날 그렇게 괴롭히던 민박집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하루아침에 짐을 싸들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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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떠한 일이건 일단 시작하면 내 일처럼 생각하고 뛰어드는 성격 탓에 난 다음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올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민박집 사장에게 2월 달까지 다음 여자 아르바이트생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나겠다고 한 것은 나였다. 어차피 민박집 일을 좋아했으니 그 꼰대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없으면 오히려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고 밴을 개조할 시간을 더 버는 것이니 나에게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한 달을 더 머물기로 했고 모든 것은 착착 진행되었다.

1월 중순, 가장 큰 창문을 밴에 만들고, 신문사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에 숙소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도착해 있었다. 밴 개조하고 편집 디자인까지 한 뒤에 한 시간 반의 이동을 해서 숙소 도착 한 뒤라 너무 지쳐 있었고, 민박집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어수선했지만 새로 온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너무나 밝게 첫인사를 건넸다. 빨리 서먹한 분위기를 풀고자 민박집에 와있던 사장에게 저녁을 배달시켜 먹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우리는 런던 한복판에서 중국음식을 놓고 둘러앉게 되었다. 새로 온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너무나 활기찼고 적극적이었다. 사장과 아르바이트생들이 둘러앉은 저녁상을 어색하지 않게 만든 건 물론이거니와 마치 인터뷰를 준비해 온 기자 마냥 쉴 틈 없이 질문들을 쏟아 냈다.

질문은 돌고 돌아 나에게 까지 왔고 난 캠퍼밴을 만들고 있으며 곧 그 밴을 타고 세계를 다니며 사진을 찍을 계획이라고 얘기했다.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억지로 저녁상에 놓여 있는 음식들에 시선을 놓고 얘기를 하다 그녀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눈을 들었다.


그렇게 나의 모든 계획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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