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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편도 항공권을 끊고 왔어요'
이 말 한마디가 중국음식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나를 그녀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전혀 계획 없이, '그냥' 편도 항공권을 끊고 온 한국인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전적으로 보였고 너무나 창의적인 여자로 보였다. 그 말 한마디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편도로 런던에 온 것이었다. 어쨌든 그 말 한마디에 그녀의 눈빛을 억지로 피하며 밥을 먹는데 집중하고 있던 난 고개를 들었고, 2018년 1월 어느 날, 그렇게 모든 게 바뀌었다.
2018년 3월 29일. 난 여전히 영국에 있었다. 아니 난 혜아와 여전히 영국에 있었다.
우린 각자의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가 되었고, 길지 않은 2 개월의 기간 동안 둘이서 꽁냥꽁냥 거리느라 밴은 진척된 게 많지 않았지만 밴의 인테리어 계획도 바뀌었다. 더블베드를 넣기로 했고 샤워실도 만들기로 했으며 부엌도 완벽하게 만들기로 했다. 덕분에 영국을 떠나는 날짜도 바뀌었다.
우린 최대한 밴을 개조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 붓기 위해 이 날 같이 민박집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바로 IKEA에서 소파와 더블침대 겸용으로 쓸 수 있는 'Day Bed'와 매트리스 그리고 침구류 등을 먼저 샀다. 그렇게 신문사 사무실 뒤편 주차장에서 침대만 만들어 놓은 채 밴라이프가 시작됐다.
여전히 개조하는데 돈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사 아르바이트는 계속하고 있었다. 650파운드(약 100만 원) 남짓의 월급 중에 20~30% 정도는 밴을 개조하는 재료비에 들어갔으며 나머지는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최대한 아껴두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 근처 마트에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했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을 사무실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사서 때웠다. 한 달 반 동안 메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마 우린 평생 먹을 샌드위치와 인스턴트 음식을 다 먹었을 거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밴 안에서 음식은 근처 마트에서 해결하고 잠은 차에서 잤으며 생리현상은 사무실 건물 화장실에서 해결했지만 샤워를 할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찜질방이나 사우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모텔도 없으니 씻을 곳이 마땅찮았다. 밴을 개조하기 몇 달 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다니던 구립 체육관이 근처에 있어서 이 곳에서 운동도 하고 샤워도 했지만 한 달 회비가 25파운드(약 4만 원)였다. 우리에게 25파운드는 거의 일주일 치 식비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큰돈이었고 심지어 두 명이면 50파운드였으니 우린 감히 체육관에 등록할 수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다행히 4월의 날씨도 여전히 추워서 개조작업을 해도 땀이 잘 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혜아도 씻는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일주일 넘게 샤워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밴라이프를 시작한 지 2주일 정도가 되어가자 더 이상 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구립 체육관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말에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을 제외하면 관리하는 사람 한 두 명뿐이었다. 우린 갈아입을 속옷과 세면도구들을 챙기고 체육관으로 갔다. 회원카드를 보여주면 리셉션에서 출근 등록을 해주고 그 카드로 헬스장을 들어갈 수 있다. 체육관에 도착한 우리는 약간은 긴장되었지만 아주 뻔뻔한 얼굴로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 당당하게 리셉션 앞 직원을 지나쳤다. 여유롭게 샤워를 마치고 다시 직원의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은 채 체육관을 나왔다. 당연히 우린 회원카드가 없었다.
샤워실은 회원카드가 없어도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우리를 당연히 회원일 거라고 생각한 직원 덕분에 우린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그때의 개운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체육관 직원이 아주 친절하게 회원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체육관에서 공짜로 샤워를 즐겼다.
완성되기 전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난 혜아에게 너무나 놀랐다. 더딘 개조 때문에 출발 날짜가 늦어지면 당연히 짜증을 낼 줄 알았고, 돈이 떨어지면 돈 벌어오라고 닦달할 줄 알았으며 샤워를 못해서 밤새도록 울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침대 하나 덜렁 있는 밴에서 침대가 있다며 나보다 더 즐거워했고 씻지도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진정시켰으며 돈이 모자라서 샌드위치도 하나밖에 사질 못했는데도 오히려 샌드위치 하나를 먹을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혜아는 내가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여자'의 모습과 달랐다. 더딘 개조와 계속되는 실수 그리고 샤워를 하지 못해서 짜증과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나였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밴은 4월 말에 완성되었고 우린 주차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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