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차장 밴라이프

#12

by Dean

급한 대로 길가에 차를 세워서 보니 앞바퀴 저 안쪽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짧은 지식으로도 브레이크 오일이 센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운행하면서 브레이크를 밟아댄다면 브레이크 오일이 다 흘러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제동 기능을 상실할 테니 최대한 빨리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상태를 자세하게 봐야 할 것 같았다. 당장 생각나는 곳은 전날 우리가 하루 정박했던 DIY 매장 주차장이었다. 상당히 드넓었기도 하고 매장의 와이파이가 주차장에서도 잡혔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할 수 있다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 변속기인 덕분에 최대한 천천히 엔진 브레이크를 써가며 주차장에 도착해서 한쪽 앞 타이어를 떼어내고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부품에서는 기름이 세고 있었고 브레이크 디스크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고 부서져 있었다.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이미 눈 앞에 보이는 모든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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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바퀴 부분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정비소 직원에게 보여주고 정확하게 어떤 부품을 교체해야 하고 비용은 얼마나 들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고 툭하면 휴무인 프랑스인들의 여유로운(?) 삶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정비소까지 걸어갔다. 7월에 들어선 프랑스는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더웠지만 구글맵으로 검색을 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 중인 꽤나 큰 규모의 정비소 사무실에 있던 직원은 다행히도 영어를 제법 할 수 있었다. 사진을 본 그는 약 500유로 정도면 양쪽 수리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어떤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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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으로 돌아가는 내 머릿속엔 온통 수리비로 가득 찼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에겐 500유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100유로도 채 안 남아 있었는데 500유로의 수리비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밴 라이프는 여기까지 인 건지, 부모님들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우리 둘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아무도 관심 없는 우리의 SNS 계정에 조언을 구하는 트윗을 날렸다. 그래도 오지랖이 넓은 누군가가 보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트위터 팔로워로부터 펀딩 사이트를 통해서 현재 사연을 올리고 모금을 해보라는 답을 받았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주차장에서 지내며 2주 동안 500유로를 목표로 하는 펀딩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주차장 밴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사실 영국에서의 주차장 밴라이프 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DIY 매장으로부터 엄청나게 빠른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고 있었고 입구 바로 옆 화장실에서 물도 얻을 수 있고 화장실도 비울 수 있었다. 같은 주차장 한 켠에는 우리가 항상 이용하던 저렴한 마트인 리들(Lidl)이 있어서 저렴하게 장을 볼 수도 있었으니 모든 걸 갖춘 완벽한 캠핑장(?)이었다. 이 정도면 큰 고민 없이 2주일은 버틸 수 있었다. 여름이라 낮시간도 길어서 태양열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니 우린 돈을 모으는데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위는 큰 문제였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지낼 때 더위를 피했던 스타벅스가 그곳엔 없었기 때문에 햇볕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한낮에도 밴에서 지내야 했다. 가끔 낮에 비가 오면 그나마 나았지만 대부분은 정말 화창한 여름 날씨였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매장의 주차장이었고 매일 끊임없이 차들이 들어오고 나갔지만 우린 별로 개의치 않고 문과 창문들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반바지와 나시만 입고 지냈다. 파리 한복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지냈는데 이 정도 즈음이야 이제는 집 앞마당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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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Y 매장 주차장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정박을 시작했을 때 난 꽤나 예민해져 있었다. 제법 구석진 곳에 주차를 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끝임 없이 지나다녔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항상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경찰에 신고해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또 도시 외곽지역의 마트 주차장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밤이면 주차장에 우리 밴만 덜렁 있기 때문에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은 인간이 지나가면 눈에 띄지 않을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걱정은 혜아였다.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 속만 돌아다니면서 지내도 쉽지 않은 게 밴라이프인데 동네 이름도 모르는 마트들 사이의 아스팔트 주차장에 차를 고칠 돈이 없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밴라이프를 하게 하다니... 혜아가 현실에 힘들어하고 후회하지 않을까 눈치가 보였다. 남자인 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여자인 혜아는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최대한 긍정적인 미래만 얘기했다. 펀딩은 금방 끝날 것이며 밴은 멀쩡하게 수리가 될 거고 우린 다시 파리로 돌아가 즐거운 밴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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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을 시작한 지 이틀 정도 지났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우리의 펀딩에 관심이 없었다. 주차장에서의 생활에는 익숙해졌지만 나의 걱정과 예민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별 반응 없는 펀딩 때문에 걱정이 더 늘었고 결국 난 혜아에게 다 털어놓았다. 예민해져 있고 걱정이 많다고 얘기했다. 혜아에게 즐거운 밴라이프가 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거 같아 나 자신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브레이크가 아예 말을 안 듣는 건 아니니 근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근처에 자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혜아가 가자고 하면 당장 떠날 마음을 먹고 있던 나에게 혜아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혜아는 한여름의 이름 모를 동네 어느 마트 주차장에서의 밴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차를 고칠 돈은 없지만 마트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있어서 행복했고 마트 건물 저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주차장 한복판에 홀로 누워서 볼 수 있어 즐거웠으며 공짜 인터넷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밴라이프를 시작한 이래 제일 재밌다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은 너무 즐거우니 걱정하지 말라는 혜아의 말에 주차장에서의 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우리의 통장에는 500유로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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