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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 Luna May 27. 2022

Viajero- Cuba

쿠바의 어떤 날들


 #1. 쿠바에 가기로 했다 간결하게 두 음절로 발음되는 '쿠바'라는 이름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졌다. 언젠가 읽은 책에 실려 있던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쿠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혁명과 자유와 정열과 살사의 나라가 궁금해졌다. 늘 여름인 나라. 이글거리는 태양에 수분을 빼앗겼다가 바다의 파도에 다시 수분을 내뿜을 것 같은 그 곳의 공기가 무작정 그리워졌다. 쿠바에 가면, 막연히 떠오르고, 어렴풋이 보고 싶은,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후드에 털이 주르륵 달린 두꺼운 롱 패딩을 꺼내 입어야하는 계절이 왔고, 히터로 데워진 공기의 건조함에 숨이 막혀갈 즈음, 여름 옷을 캐리어에 가득 담고 나는 쿠바로 떠났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이제 여기에서’처럼 11시간을 건너, 아니 15시간을 건너 너를 만나러 그 곳에 가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올드 아바나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빈티지한 건물들의 금간 벽이 이어진 골목을 걸으며 점점 더 길을 잃고 싶어졌다. 눈에 보이는 어느 곳에서도 음악이 흘러 나오고, 음악이 흘러 나오는 어느 곳에서도 살사를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그 누구와도 웃으며 ‘올라’라고 인사를 했다. 이곳은 쿠바였다.


 #2. 올드카 타기 낯설면서도 익숙한 바닷가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말레꼰 해변을 걷다가 쌀쌀해져서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여유로움을 즐기던 중, 눈앞에 펼쳐진 바닷가 길에 올드카들이 씽씽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고 싶었다. 바닷가 길을 달리고 싶었다. 광장에서 올드카를 타고 시티투어를 하면 가격도 비싸고 시간도 꽤 걸린다는 정보를 들었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택시를 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냈다. 올드카 택시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숙소 주소를 휴대폰 화면에 띄워두고, 카페를 나와 핑크색 올드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엄청난 바람을 맞으며 말레꼰 바닷가에 서서, 내가 원하는 택시가 과연 올지, 나 자신과 내기를 하고 싶어졌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저 멀리서 핑크색 올드카 택시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운 나는, 드디어 올드카를 타고 말레꼰을 달리게 되었다. 바닷 바람에 내 머리는 마구 휘날렸고, 차 안에서는 쿠바 음악이 둠칫둠칫 흘러 나왔다. 나는 연신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고, 기사 분은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보이시며 뒤돌아보고 웃어주셨다. 거친 엔진 소리와 어마어마한 매연과 함께 자유를 느꼈다. 무려 1950년대에 만들어진 올드카를 아직도 소장하고 관리해서 이렇게 달릴 수 있게 하다니, 쿠바 사람들의 정성과 낡고 오래된 것의 멋스러움에 반해 버린 시간이었다. 기념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친절한 기사 분은 중간에 차를 세워두고 운전석을 내 주시며 나를 앉게 했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셨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마치 내가 올드카를 운전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날의 바람 불던 말레꼰으로 데려가 준다.

 #3. 함께 살사를 배우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눌러 앉아 살고 싶었던  도시 트리니다드에서 머물던 삼일 내내,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면 살사 강습을 받으러 갔다. 작열하던 태양을 피해 그늘을 찾아 좁은 돌길 골목을 일렬로 걸으며 살사 강습소를 찾아 가던 우리들을 맑은 바람과 솜사탕 같은 구름이 따라 왔다. “원. 투. 쓰리. 포! ”박자를 세며 우리는 열심히 살사를 배웠다. 볼 때마다 늘 감탄했던, 아름답고 건강한 몸매를 가진 우리의 살사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었다.  “릴렉스!” “굿!”을 연거푸 외치면서 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목이 점점 쉬어가시면서도 열정적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다. 트리니다드의 좁은 골목길, 상점들이 즐비한 곳에 있던 작은 강습소에서 춤을 배우고 있는 동양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구경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울에 비치고 옆에서 보이는, 어설픈 모든 순간들을 우리는 웃으며 보냈다. 누가 춤을 잘 추는지 못 추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왜 춤을 배우는 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즐겁고 새로웠다. 그렇게 겨우 익힌 살사의 기본 스텝은 쿠바에서 지내는 내내 몸에 배어 버렸다. 시엔푸에고스의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해가 진 말레꼰 바닷가를 걷다가도 동행 중 누군가 갑자기 “원.투.쓰리.포!” 박자를 카운트하기 시작하면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춤을 췄다. 바로 길거리 그 자리에서 일렬로 서서. 어떤 시선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쿠바였기 때문에.

 #4. 아름다운 동행들 와인과 여행의 공통점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값비싼 와인도 불편하고 싫은 사람과 함께 마신다면 그 풍미는 줄어들 것이고, 저렴한 와인이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면 맛있고 행복할 것이다. 여행도 그렇다. 아무리 멋진 곳에 가더라도 불편하고 싫어지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피곤하고 지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행에서 동행이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다. 쿠바에 가기 전까지는. 함께 한 동행들은,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 이런 멋진 분들이 살고 있다가 이제야 등판해서 이 먼 곳 쿠바에서 만났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 개성에 반하는 시간들을 연출해 주었다. 그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들 센스 있고 배려심이 넘쳤으며 정말 아름다웠다. 구수한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하시던 M님은, 쿠바의 꽃이었다. 쿠바 남자들은 그녀를 본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와 말을 걸어 왔고 함께 춤을 추고 싶어 했다. 함께 있던 동행들이 무색해질 만큼 M님의 인기는 날마다 거침없었다. 클럽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녀를 향한 구애는 끊이지 않았다. 쿠바의 마지막 밤, ‘카레’라는 남자를 길에서 만났다. 근육질의 두터운 어깨와 팔을 가졌던 그는 M님을 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을 발견한 표정으로 그녀 옆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야채와 과일을 팔고 있었는데, 자신의 물건들을 팽개친 채, M님과 길거리에서 즉석으로 살사를 추었다. 길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우리들 소리에 옆집과 앞집의 쿠바 사람들이 잠을 자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다 보며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아바나의 밤이었다. C님은 정말 어려 보이는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랄 정도로 앳되었다. 행동이 재빨랐고, 재치가 있었고,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C님은 쿠바에서 물놀이를 하려고 한국에서부터 튜브를 가져왔다. 바라데로의 아름다운 바닷가와 호텔 수영장에서 C님의 튜브는 빛을 발했다. C님의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바람을 불어 넣어 만든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즐기던 우리를 보고, 지나가던 외국인들은 멋지다고 칭찬했고, 심지어는 튜브 대여료가 얼마냐고 물어보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바라데로에 있는 3일 내내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하며 바다 수영을 했다. 심지어 바라데로를 떠나는 날 아침까지 바다에서 인어공주처럼 수영을 하고 말갛고 눈부시게 걸어 나왔다. N님은 정말 우아했다. 그녀의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는 고상하고 세련되었다. N님은 원피스를 즐겨 입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으며 아름다운 본인도 늘 멋진 모델이 되었다. 시엔푸에고스의 옛 궁전에서 N님은 사진 작가로 변신해 우리들에게 점프를 하게 하고, 회전 샷을 찍기 위해 구도를 잡고 컷을 외쳤다. 멋진 슬로우샷과 아름다운 개인 사진들을 N님에게서 받고 감동 받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있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워주시고, 자신을 낮추시는 매력적인 분이었다. 나이를 듣고도, 정말 믿을 수 없었던 뱀파이어 외모를 가진 J님. 동안 대회 대상을 휩쓸 비주얼을 가진 J님은 걸어 다니면 화보가 되었다. J님이 있는 모든 쿠바는 그대로 예술 사진이었다. 군살이라고 하나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 모든 동행들의 부러움을 사는 분이었다. J님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J님 옆에서 사진을 함께 찍혀 비교가 되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사진을 예쁘게 많이 찍어 주셨다.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정말 고운 분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늘 따뜻하게 잘 챙겨주셨다. J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 내내 편안하고 즐거웠다. 자유인의 경지를 넘어, 자연인의 면모를 보여 주었던 B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남은 음식을 항상 싸가지고 나와 길거리의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마음 따뜻한 분이었다. 화려한 외모와 멋진 스타일은 어디를 가건 주목을 받았고, 멋진 살사 실력으로 쿠바의 클럽을 점령했다. 그리고 손재주가 좋아 동행들의 스타일링을 담당했다. 머리를 묶어 주고, 메이크업도 해 주며, 본인의 독특하고 과감한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며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게 해 주었다. B님은 쿠바에 두 번째로 왔는데, 처음 쿠바 여행 이후로 삶이 달라졌다는 사연을 트리니다드의 숙소 옥상에서 이야기하며 동행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멋쟁이 우리 동행들은 흥도 많았다. 우리는 매일 쿠바를 즐겼다. 모히또와 데킬라, 다이끼리를 마셨고, 무대에 이끌려 나가 춤을 추었다. 언제나 누군가 한 명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옆에 있던 다른 한 명이 그 이야기를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듣고 있던 또 다른 한 명이 그 이야기를 코믹하게 각색하기 시작하면, 옆에 있던 한 명은 깔깔깔 웃으며 쓰러졌다. 그런 우리들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추억을 만들어 주는 동행도 늘 함께 했다.  책 이야기, 직장 이야기, 여행과 사랑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술잔을 기울이던 쿠바의 시간들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아주 가는 실로 연결된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어딜 가더라도 따라다니는 가느다란 실. 어릴 적 친척들이 모여 있던 풍경들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기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실처럼 따라다녔다. 언니 같고, 동생 같고, 조카 같고, 엄마 같고, 아빠 같고, 형부 같고, 딸 같은. 이런 묘한 가족이 쿠바에서 잠시 함께 살았다.

#5. 그리움을 남기고  

 시엔푸에고스로 가던 길은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 같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우리 택시 앞에는 마차가 천천히 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그 앞에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어떤 사람은 길 옆으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같은 길을 가고 있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갑자기 음악이 흘러 나온다면 이 모든 풍경들이 멈춰서고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이 뛰어 나와 춤을 출 것 같았다. 에메랄드 빛 카리브해를 하루종일 바라 보았던 바라데로에서는 지구 반대편 바다의 위엄에 할 말을 잃고 매료되었다. 바라볼 때마다 색깔이 변하는 바라데로 바다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풍덩 빠져 허우적댔다. 물놀이를 하던 동행들, 선베드에 누워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종일 책을 읽던 동행들, 그리운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던 동행들. 우리는 주어진 시간들을 즐겼다. 한국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들여다 보던 휴대폰은 쿠바에서는 단지 시계와 카메라일 뿐이었다. 쿠바의 묘한  가족은 매일 춤을 추고 웃고 이야기하고 지내다가 검은 롱 패딩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겨울 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건물들은 채도가 낮은 색감으로 이루어진 나라. 그 누구도 '올라'라고 인사하지 않고,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얼굴 절반을 마스크로 가리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우리는 모두 돌아왔다.  막연히 떠오르고, 어렴풋이 보고 싶은,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던 쿠바에서 나는 무엇을 만났을까. 가끔 꿈을 꾼다. 쿠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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