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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건반검은건반 Dec 13. 2022

맞춤형 학업성취도 평가를 치르며

선행학습과 교육과정 파행 운영에 대한 고민도 없이 강제 실시하게 하는가

2022년 8월,

학교로 공문이 왔다. 

처음에는 자율평가로 학업 성취도 평가 공문이 왔으나, 곧 수정되어 다시 나왔다.

다른 내용은 변동 없이 자율실시가 아닌 의무 실시로 수정되었다.

사유는 교육감 공약이행이다.


처음에 이 공문을 읽었을 때 2009년 6학년을 담임했을 때 겪었던 끔찍한 일제고사가 생각났으나, 그때와는 분위기도 바뀌었고, 학반 평균을 내거나 학교별 줄 세우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시험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아이들을 지도해 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은 아이들 마다 문제도 다르다고 하니 비교도 어려워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는데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컴퓨터로 실시하는 이번 시험은 시험지를 활용해서 치르는 시험보다 몇 배는 과정이 복잡했다.

이 또한 처음으로 컴퓨터를 활용해서 치는 시험에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험 하루 전, 시험 칠 내용을 점검하다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시험 범위가 6학년 2학기 마지막 단원까지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공문에 6학년 1,2학기 범위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교육청에서 교육과정 파행 운영과, 선행학습을 해야 만 시험을 치도록 시험 범위를 주었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12월 13일에 치르는 이 시험에, 방학을 제외하고도 2월 17일까지 한 달 반 가량 등교일이 남은 이 시점에서 내가 교과서 전체를 가르쳐야 이 시험을 치르게 될 수 있을 거라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먼저 교육과정 평가원에 전화했다.

우리가 시험을 접수한 곳은 교육과정 평가원이었다. 12월에 접수하는 6학년이 2월에 배워야 하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평가를 개발했는지 물었다. 자신들은 자율 평가이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6학년을 대상으로 평가를 실시하기 위한 접수를 받으면서 그 평가를 치는 학생들이 어디까지 배우고 있는 시기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시험 범위를 잡은 것이 과연 교육과정 평가원의 책임은 없는지 되물었다.

담당자는 당당했다. 

평가원은 시험 문제를 제시할 뿐 거기에 대한 부분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적어도 교육과정 평가원이면 시험 치는 시기에 맞는 범위를 제시해야 되는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꼭 문제가 제기되어 내년에는 변화하도록 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다음으로 강제로 실시하게 한 부산시 교육청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왜 12월 중순에 2월까지 배워야 하는 내용을 치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이런 문의가 많았다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제까지 시정이 안되냐고 교육청이 강제로 시험을 치게 했으니

책임을 교육청은 져야 한다고 했다.

시험 치는 학생들의 시험 범위에 대한 고민도 없이 시험을 강제로 실시하라고 했냐고 하니까

"자율 평가고 강제로 하는 것은 아니니 강제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뭔 말이냐고 어쨌든 학교에게 교사에게, 선택권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신뢰 있는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게 교육청의 역할인데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수업만 들으면 시험을 잘 칠 수 있도록 범위를 정해야지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잘 칠 수 있는 이런 시험 운영은 사교육을 부추기고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말했다. 

먼저 내가 요구한 사항은 당장 내일 칠 시험의 범위를 2학기 중간고사 범위까지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니까 지금 범위 조정 안된다길래 디지털 신기술로 학습하는 미래 시대에 안 되는 게 어딨냐고 강하게 말했지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내일 우리 아이들이 안 배운 거 나왔을 때 

"선생님,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만 잘 기억하면 100점 받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왜 배우지 않은 내용이 나왔어요?"

라고 묻는다면 아이들에게 답할 수 있는 말과

옆반 앞으로 부산교육의 희망이 될 후배 선생님께서

 "왜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이 2월에 배워야 할 내용까지 시험 범위로 잡았을까요?"

라고 하면 부장교사로서, 선배교사로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말을 말씀해 주시면 

이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장학사는 침묵으로 답했다. 


대답을 하실 수 없다면 내일 아침 당장 이 시험을 필수가 아닌 자율로 변경한다고 전체 공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부모님들께 시험 결과를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또한 안된다고 하며 이 상황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오늘 아침까지 고민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부모님의 경제력이 좋은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고 선행학습이 빠른 편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아이들에게 아무 말하지 않고 시험을 치르더라도, 아이들이 잘 풀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공부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험 직전 아이들에게 내 고민의 과정을 다 말했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지 않은 원뿔, 구, 원기둥 문제가 보이면 조용히 손을 들라고 했다. 선생님이 가서 대신 풀어준다고 말이다. 

막상 시험이 시작되자 원뿔과 구, 원기둥을 시각적으로 보면 바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주어져 아이들이 손을 들지 않았다. 의젓하게 시험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보니 멋지고 뭉클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착잡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과정이 빛나면 결과도 빛날 거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 시험의 공정성이 이미 무너졌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시험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학부모님들께 편지를 썼다. 보내지 못할 편지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편지를 적고 나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늘 저희 반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주시는 감사한 학부모님,


이번에 치른 성취도 평가는

교육과정 평가원에서 문제를 내고

부산시 교육청에서 6학년 전체 필수로 시험을 치게 하였습니다.


저는 시험 범위가 당연히 6학년 범위이되, 배운 곳까지 일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공지하고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2월에 배워야 할 내용까지 시험 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식 및 암기 중심으로 학습 정리만 해서 진도를 빼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아이들은 발표시간을 잃게 되고,

2월에 학교에서 배울 내용이 없어집니다.


말 그대로 교육과정을 파행 운영하고 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육청에 항의하였으나,

교육청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교육과정 파행 운영이 우려되지만

하지만 올해는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우리 아이들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선생님 말을 신뢰하는 수업 태도를 배워가는 것이

초등에서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과 학습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험 문제가 나오게 되면,

선생님과 수업을 열심히 했어도 틀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을 믿고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실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2월에 학습할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게 되면

선생님이 답을 알려주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험은 아이들이 건강한 학습 습관을 잡고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을 해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학부모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결과를 보시고 다른 아이와 절대 비교하지 말아 주시고,

다른 반과 문제도 다르니 다른 반 학생과도 비교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아이들은 새롭게 달리기 위해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단계입니다.

시작 전부터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학부모님들께서 힘을 주십시오.


오늘 시험을 치르면서

진지하게 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감동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열심히 시험을 치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을 응원하고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 평가의 결과에 

"애썼어. 시험 치느라 힘들었지? 이 정도면 정말 잘했다."

"시험을 처음 쳐봐서 그래. 문제 푸는 것에 익숙해지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와 같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부탁드립니다. 


늘 저의 학급 운영에 응원을 보내주시는 학부모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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