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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건반검은건반 Jan 08. 2022

통지표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 대한 내 생각

과정중심평가가 도입되고

내가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어느 카페에서 아이의 통지표 종합의견을 보고 어떤 아이인지 의견을 묻는 글들이 요즘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통지표 종합의견을 받고 많은 대한민국의 부모님들이 이 글을 쓰신 선생님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분석하느라 고민에 빠지셨다. 

'~~ 는 매우 우수하고'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에게 써주는 말, '~~ 는 양호함' 그냥 중간 정도? 이렇게 부모님들끼리 비교해 가고 유추해 가면서 서로 분석해 주고 계셨다.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일지 얼마나 궁금하실까. 

요즘에는 칭찬들 속에 우리 아이가 고쳐야 할 점을 슬쩍 감추어 적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단점이 있는지 부모님은 궁금할 수 있다.


하긴 내 어릴 때 통지표를 보면, 정말 직설적으로 적어주셨다. 6학년 때 통지표이다.

 

 

이런 통지표를 받은 우리 부모님은 나의 잘난척하는 점을 고쳐주시기 위해 정말 애쓰셨다. 평생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강조하시며 나를 키우셨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잘난 척도 했지만 참 말이 많았다. 잘난 것도 별로 없었는데 본인이 잘하는 점만 생기면 말하고 싶어 했다. 나는 지금 40살이 넘어서도 이런 점이 있어서 누르기 위해 매번 노력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보시는 학생의 모습은 굉장히 객관적인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와 함께 평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나의 경우에 나는 자라면서 겸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선생님의 말을 따르려던 것을 보면 나는 참 순종적인 학생이었다. 이 아이는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도덕의 덕목들을 배우며 그냥 두었어도 어느 순간 겸손해야 됨을 배웠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자책도 하고, 이후에 잘난 척할까 걱정하고 말도 아꼈고, 참 소심해졌다. 중학교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 회복했지만.


월말평가처럼 매 달 시험을 치지는 않았지만, 2000년 이후에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초등에서도 있었다. 성적은 아이들에게 통보되었고, 학습 부진학생들은 부모님과 상담을 했다. 2008년부터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더욱더 학력이 강화되었다. 엄청난 부작용을 겪은 후, 2017년부터 과정 중심 평가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낯선 이 과정 중심 평가에 부모님들은 도대체 우리 아이의 성적을 알 수 없어 답답해했다. 결국 중학교 가서 시험을 칠 것인데 왜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지 않느냐는 주장도 많았다


나는 과정중심평가를 환영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그 당시 심각할 정도로 높았다. "학력이 우수한 학생 = 미래의 희망"이라는 분위기가 그것을 부추겼다고 생각한다. 한 명이 자살할 때마다 학교에는 위기 진단 공문이 날아왔다. 그 당시 우리 반에도 일기장에 <죽고 싶다>고 쓴 아이가 있어서 나는 그 아이를 Wee 센터와 연계해서 상담을 실시했고,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아이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했다.


청소년들은 자존감(자아존중감)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성장 속도도 다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 다른 이 아이들은 자라면서 형성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은 더 하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어린이들도 우울감이 커진다.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절에 서열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자아존중감은 성인이 되었을 때 우울감 조절력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온 아이들은 가정에서는 늘 1등이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내 새끼인 것이다. 그 아이들이 90점, 80점, 50점이 된다고 해도 우리 집 1등인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50점, 60점이 되는 순간 우리 반에서의 자신의 서열은 그대로 정해져 버린다.

아이들은 내 성적이 부끄럽다. 자신이 모자라게 느껴진다.


2008년부터 이명박 정부에서 실시한 일제고사와 학교별 서열 매기기에서 그 부작용은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그때 교사로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을 겪었다. 공부를 시켜도 시켜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반 착한 아이를 붙들고 울었다. 학교에서는 부진아 0명을 만들라고 압력을 넣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그 아이는 내 속이 썩어 들어갈 정도로 공부를 못했다. 나는 그 당시 둘째 임신 중이었는데, 소심한 성격에 우리 반에서 부진아가 나올까 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 아이는 내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태어나서는 경련을 해서 오래 병원에 다녔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면 속이 상했다.

그래서 지금도 너무 미안하다.


"부진아면 어때서?

공부 잘하던 사람들이 세상에 빛이 되나요?

우리 주변을 돌아보세요.

그때 시험 잘 친 친구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고 있나요?"


이명박 정부는 정말 그때의 6학년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학교의 서열을 매기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30대 초반의 어린 선생님은 내가 부족해서 우리 반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스스로 가스 라이팅을 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신 있게 "뭐 어쩌라고, 나는 우리 반 아이가 부진이 있어도 괜찮아" 할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이 등장하고, 시범실시를 거쳐서 2017년 전국적으로 도입된 과정중심평가는 시험을 안 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치르는 평가를 없애고, 담임 선생님이 학급의 수준에 맞추어 평가를 하여 피드백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옆집 아이와 우리 아이는 같은 반이 아니면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한 것이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시험에 나오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듣는 태도가 좋은 친구들이 시험을 잘 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시험이라면 학생이 시험에 임하는 과정을 보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이 공개되지 않으니 아이들은 더 이상 누가 공부를 잘하는 친구인지 추측만 할 뿐 알 수 없었다. 피드백도 교사와ㅡ학생 간에 이루어지고 학습이 늦은 아이들은 학부모님과 상담으로 학습상태를 끌어올렸다

학급에서의 아이 공부 순위도 알 수 없으니 모두가 1등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모자라다고 느낄 필요도 없다. 


나도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의 통지표 종합의견을 적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2학년 아이들이다.

나는 모두 다 아주 잘한 칭찬들로만 적을 예정이다. 왜냐하면, 교우관계나 학습에 문제가 있었던 아이들은 정말 너무 많이 전화로 상담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들도 충분히 아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도 당연히 어려움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2학년이기에 아직 교우관계도 성장하는 단계여서 빠른 인지와 심리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교내에 계시는 전문상담 선생님과 프로그램을 연결해서 사회성을 익힐 수 있도록 했고, 어머니도 사설 심리 치료센터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학급에서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주시하며 아이들에게 <우리는 각자 다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당연히 아이는 그 이후에도 친구들과 잦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어머니께 상황은 말씀드리고 함께 고민했다. 어머니는 너무 속상하셨지만 받아들이셨다. 이건, 감기 같은 거다. 사랑이라는 약을 담아 다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래서 통지표의 종합의견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아이들의 장점만 찾아 잔뜩 적어줄 생각이다.

진짜 신경 써야 할 내용은 직접 상담했으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 아이도 부모님도, 모두


우리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통지표를 찾아보았다.

그때 친구가 없어서 담임선생님과 한참을 걱정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초 5까지도 친구관계에 어려움을 겪어 1년에 한 번 이상 학교 가기 싫다고 외롭다고 울었다. 초 1 담임 선생님은 그 부분을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 적어주셨다.



지금은 이 아이가 중2가 되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낸다. 얼마 전에는 반 친구들의 투표로 선정된 <표창장 - 공감상>을 타서 집에 가지고 올 정도로 자신감도 높아졌다. 친구가 많아져서 친구 걱정은 안 한 지 좀 지났다. 한 번씩 혼자 있는 친구들을 볼 때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말도 걸고 초콜릿도 주고 온다고 했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라면서 변화한다. 물론 대학이 성공의 척도는 아니지만 변화의 예로 들어보겠다.

20년을 가르쳐 보니 초 6에 만났던 우리 반 1등이었던 아이가 지방대에 진학했고, 초4에 내가 가르친 우리 반 중간쯤 하던 아이, 그 당시에는 시험을 쳤으니까 딱 중간이었던 그 아이, 수업 중에 교실에서 설사를 해버려 똥쟁이가 돼버린 아이는 고려대 자연과학부에 진학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선생님을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성인이 되어 나를 다시 찾아온 아이는 식당에서 배달 알바를 아이였다. 그 당시 그 아이는 학급에서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의 많은 자람을 지켜보니, 정말 어떻게 자랄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 하나가 자라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에 동감한다. 아이가 마음의 뿌리가 건강하도록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주자.


통지표 종합의견은 그냥 흘러 보내자.

진짜 못했음 학교에서 전화가 벌써 왔을 것이다.


이번에 우리 둘째 딸 초5 아이는 보통을 잔뜩 받아왔다. 도대체 뭘 열심히 안 했길래 보통이 이렇게도 많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흘러 보내기로 했다.

우리 아이는 그릇이 커서 나중에 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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