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아이가 친구가 없을 줄 몰랐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정말 활달했으며 밝았다. 친구들이 나와 놀고 싶어 했다. 처음 보는 동네 꼬마들하고도 잘 놀았다.
난 얼굴이 크고 뚱뚱해서 친구들이 돼지, 고릴라라고 놀렸는데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우리 남편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말이 없고 조용했다. 우리 큰 딸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남편을 닮았다.
1.1학년
우리 아이가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안 것은 초1 학년 때였다. 1학년은 엄마끼리 친해야 아이들이 친하다고 해서 같은 아파트 친구와 친해질 수 있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우리 아이는 그 아이와 너무 맞지 않았다.
성격이 화끈한 그 친구는 느리고 고집 센 우리 아이를 많이 답답해했다. 반응 없는 우리 딸이 답답했을 것이다. 친구를 사귀려면 싫은 것도 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 딸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같이 학원차를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딸이 싫다고 하자 딸의 가방을 바닥에 던졌다고 집에 와서 울며 말했다. "친구 없어도 되니까. 그 친구랑은 같이 못 놀겠어." 나는 너무 속상했지만, 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 아이와 조금씩 상처받지 않고 멀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친구와 멀어지고 나서 우리 딸은 한동안 잠잠했으나,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었다.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했다. 나는 교사 맘인데도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어떻게 해줘야 될지 몰라서 잠이 오지 않아 가입된 맘 카페에 교우관계 글만 밤을 새우며 검색했다.
아이는 쉬는 시간 친구들이 동물 흉내를 내며 교실을 기어 다니는 데 자신은 동물 흉내를 내며 교실을 기어 다닐 수 없다고 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도 특별히 없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한 명이 전학을 왔다.
나는 빠르게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도록 그 아이게 게 말을 걸고 스티커도 붙여주라고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전학생 엄마와 넷이 만나며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그 친구랑도 그렇게 잘 맞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 우리 아이의 성격으로 봤을 때 어느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겨우 엄마의 노력으로 1학년을 잘 마쳤다.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2. 2학년, 3학년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나자, 나는 2학년도 친구가 없이 외롭게 보내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2학년이 되자마자 3월의 첫날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스티커를 주고 오라고 예쁜 스티커를 사서 보냈다. 아이는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스티커를 주었고, 둘은 금세 친해졌다. 둘 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둘은 1년 내내 쉬는 시간마다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지 않으니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3학년이 되고, 우리 아이는 반장선거에 나가서 반장이 되었다. 친한 친구도 생겼다.
(반장은 인기로 되는 것이 아니고 멋진 소견발표로 된다. 나는 미리 준비시켰다.
다음에 반장선거 준비하는 법도 적어보겠다.)
역시 3월의 첫 주는 친구를 만드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좋아하는 친구가 생겨 재미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그 친구가 4월에 전학을 가버렸다.
그 친구가 전학을 가버리자 우리 아이는 또 외로운 상태에 빠졌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것은 결혼 후, 남편도 약간의 우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첫째 딸도 비슷해 보였다. 작은 자극에도 상처를 받았고 쉽게 우울해했다. 엄마가 나서서 친구를 자꾸 만들어 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울고 있으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친정엄마(외할머니)가 나섰다. 마침 딸 같은 반 친구 외할머니가 친정엄마와 친하셔서 그 딸에게 우리 아이의 친구가 되어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아이에게 마음을 단단히 하는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먼저, 행복한 일은 바위에 적어 오래오래 기억하고, 상처받은 일은 모래에 적어 파도에 보내버려.
세상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때마다 속상해 해고 이겨내지 못하면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없어.
만약에 그래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면 집에 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렴.
먹기 전에 주문을 외워. 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내 속상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맛있게 먹어. 극복하는 건 연습이 필요해."
친정엄마가 노력해주셔서 초3에 만들어 준 우리 아이의 친구는 중 2가 된 지금도 베프이다. 우리 아이는 전학을 와서 같은 동네에 살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싸우지 않고 더 친하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3. 4학년
4학년은 아이가 가장 괴로워한 해였다.
3학년 때 사귄 단짝 마저 우리 아이를 무시했다.(지금까지 친한 이 친구가 이 시기에는 소원했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다가가니 친구들이 아이를 "저리 가"하고 밀었다고 아이는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그때 나는 아이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너희 엄마 선생님이라서 좋겠다."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너무 싫다며, 아이는 나보고 이 학교를 떠나 달라고 했다.
경험에 의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다른 엄마와 친해지기, 스티커 주고 오기, 친구가 없는 다른 친구에게 접근하기 등등) 노력했지만 그 해에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우울한 표정의 우리 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아이는 전담실에 다녀올 때도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걸어왔다.
나는 이 학교를 떠나기로 하고 전근 신청을 했다.
나는 아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집에서 같이 많이 시간을 보내주었다.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을 가득 사놓았다. 아이는 하교 후 매일 속상한 일 사라지기 주문을 외우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버티기였다.
아이는 외로웠지만 참고 버텨냈다.
"00야, 이렇게 외로운 순간도 긍정적으로 잘 버티는 것도 공부야, 너무 잘했어."
나는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친구 없어도 괜찮아. 엄마가 친구가 되어 줄게."
이때 나는 아이를 위해 또 다른 노력을 했다.
강아지를 입양한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무서워했고, 만지지도 못했지만 아이를 위해 몰티즈를 데려왔다.
강아지는 한없이 우리 아이를 사랑해 줄 것이다.
내가 출근해서 집에 없을 때도 아이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아이가 하교해서 집에 오면 "멍멍!"하고 짖어서 반겨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강아지를 너무 무서워해서
처음에 강아지가 집을 돌아다니니 어찌할 바를 몰라 울타리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니 하도 낑낑거리고 짖어서 결국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4년 넘게 키워서 지금은 우리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책을 사주었다.
-체리새우 (비밀 글입니다.)
소녀의 세계(만화책)
이 책은 사춘기의 감성이 들어가 있는 책들인데
특히 소녀의 세계를 읽어보면 예쁘고 똑똑한 친구들도 친구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한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외로운 아이들은 세상에 많아."
네 마음이 누구나 겪는거야, 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에게 노래도 불러주었다.
"산토끼 달토끼"라는 노래이다.
<산토끼 달토끼>
깊은 산속에 사는 작고 예쁜 산토끼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친구를 찾다가
쫑긋 귀를 세우고 달빛 따라갔더니
달에 사는 달토끼 노래가 들려요
산토끼야 산토끼야 어두운 밤 외로울 때면
깡충깡충 달빛 따라와 귀를 기울여 보렴
산토끼야 산토끼야 너를 위한 노래 해줄게
랄라랄라 함께 부르자 우리는 친구야
산에 사는 산토끼(깡총)
달에 사는 달토끼(랄라)
멀리 있어도 우리는 친구야
산토끼가 친구가 없어서 친구를 찾으러 갔는데
달토끼가 멀리서 산토끼를 위한 노래를 해준다.
그러니까 달토 끼는 산토끼 마음의 친구인 것이다.
얼마나 외로운 친구가 많았으면 이런 노래가 나왔을까.
딸, 너만 겪는 성장통이 아니란다.
아이 아빠는 놀이동산 연회원권을 끊어
주말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동산에
데려가서 실컷 놀게 했다.
그때서야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좀 쉬었다.
4. 그 후
나는 아이가 5학년에 올라갈 때 학교를 떠났다.
5학년 때도 같은 반의 친한 친구는 없었으나, 감사하게도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나 학급 분위기가 외톨이 없이 서로 같이 노는 분위기였다. 딸은 단짝이 없어도 외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다시 반장이 되었다. 방송부원도 되어 학교 일도 열심히 했다.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아왔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친정엄마의 암 판정으로 치료를 받아야 해서 공기 좋고 병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12월, 중학교 배정 전에 전학을 가기로 했다.
아이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두렵다며 울었다. 아이가 6년을 자라온 학교의 졸업장이 아닌 전학 간 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친구관계가 걱정되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에 자주 가지 않아서 괜찮았다.
나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아이와 매일 아파트 앞 공원을 걷고 달렸다.
운동을 하며 아이와 대화를 많이 했는데 주제는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등 가벼운 것이나 아이가 원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매일매일 운동을 시켰지만 아이는 자꾸 살이 쪘다)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아이는 생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쑥 커졌다. 졸업식 때만 해도 반에서 키가 젤 작았는데 갑자기 165cm가 넘어버렸다. 이전에는 아이가 늘 말이 없고 조용해서 입이 꼭 두꺼비같이 삐진 모습이었는데 그 아이는 어디 갔는지, 입 모양이 늘 웃고 있었고, 너무 밝아졌다. 학교에서 절친들도 많이 생겼고, 반 친구들의 투표로 선정한 인기상도 받아왔다.
학교 반 친구 중 1명이 매일 엎드려 있고 외로운 아이가 있다며 한 번씩 그 아이에게 말도 걸고 초콜릿도 주고 그 아이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 그래도 워낙 그 아이가 말이 없어 가까워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놀이동산으로 체험학습을 갔는데 그 친구는 친구가 없을 것 같다면서, 같은 무리 친구들에게 그 아이와 같이 놀이동산에서 놀자고 설득을 했다고 했다. 친구들도 동의해서 같이 다니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신청서를 내는 날, 그 친구는 체험학습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는 그 친구가 예전의 본인 같다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는 참 또래 아이들보다 어렸던 것 같다. 또래 친구들은 우리 아이랑 놀기에 유치했을 것이다. 자신들보다 정신 연령이 낮았던 것이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늦었다. 사회성 발달도 늦었고, 생리도 늦었다.
아이를 믿고 기다려야지, 하는 마음보다 아이가 학교 다니는 내내 이러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초등학교는 약과일 텐데 중학교 가서 왕따를 당해 힘들어하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미리 많이 했다. 같이 아이 키우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리 아이가 친구가 없어서 슬퍼한다고 많이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를 겪었어도 아이의 편에서 아이의 마음을 챙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아이가 중, 고등학교를 힘들어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버티기를 너무 괴로워하면 전학을 시키거나 홈스쿨을 해서라도 아이가 원하는 방향을 함께 고민했을 것이다. 엄마만이라도 아이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마음이 단단하면 어른이 되어서라도 아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 믿고 응원했을 것이다.
요즘 코로나 상황이라 친구들과 놀러도 못 다니고 학원도 안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아이는 나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조른다. 나는 딸이 얼른 자라서 엄마를 찾지 않기를 기대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이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내딛을 수 있도록 마음의 뿌리를 단단해해 주는 데 온 마음을 쏟을 것이다.
날이 춥고 귀찮아서 정말 나가기가 싫고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고 싶지만 아이의 마음의 뿌리에 물을 주기 위해 오늘도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