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바로 알 수 있는 거짓말이 몇 개 있다.

by 그리다너


세상에 바로 알 수 있는 거짓말이 몇 개 있다.

‘혼자 먹는 밥이 맛있다.’


자취 4년차 세숫대야를 뒤집거나 안 보는 책을 받침 삼아 밥을 먹는다. 예쁜 인테리어도 아니고 오래된 벽지에 흔한 무늬목 인테리어필름을 붙인 문이 달린 원룸이다. 복도의 소리가 전달되는 철문을 닫고 들어서면 큰 방 하나, 오른쪽에 미닫이문을 밀면 작은 부엌이 있다. 다시 유리문을 밀고 나와 오른편에 아주 작은, 창문을 열면 건너편 빌라가 보이는 욕실이 위치한다.

이 집에서 때로는 친구가 와 피자를 시켜먹기도 하였고 동영상 앱으로 레시피를 보며 김치찌개를 끓여먹기도 했다. 그러나 ‘맛’이 없다. 그래 다들 알 거다. “이게 맛있는 줄 아는데 먹고 싶진 않은 맛”이다.

해먹은 요리가 맛없을 때도 있다. 집 요리법 그대로 하는데 어머니 요리의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타지 생활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어머니는 고추장, 된장, 지간장 등을 직접 담으셔왔다. 그것들을 담은 장독대들은 오랜 세월 시골 마당에 놓여있었지만 도시로 이사 후에는 베란다로 가게 되었다. 다시 전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을 땐 그리로 옮겨졌다. 현관문을 열고 전실에 들어선 손님들은 다 장독대들로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장독대 안 장들을 통에 덜고 비닐로 꽁꽁 감싸 자취하는 원룸으로 들고 와서 요리를 하면 맛에 차이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요리법은 같은데도 말이다.

하루가 끝나고 어머니와 영상통화하며 오늘 끓인 찌개를 보여드리며 나름대로 맛있다고 말씀드리지만 그게 나름이라는 의존명사가 앞에 있어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동영상 앱으로 적적한 식사시간을 때우며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보던 영상이 끊기기라도 하면 먹던 숟가락의 내용물만 입에 털어넣고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은 다음, 다음에 볼 영상을 찾고 틀어논 뒤에야 다시 숟가락을 들고 먹는다.

1인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지금 인스타그램, 유튜브가 유행인 건 ‘두려움’과 연결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온 사방에 사람들이 득실거리지만 각자의 이해관계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순 없고 상처에 가면을 쓴 뒤 진심은 숨기는 채 살게 되는 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감정대리인’을 찾게 된다. 나대신 추앙받는 사람, 웃어줄 사람, 화내줄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꿩 대신 닭이라지만 닭 먹고 만족이 안 되는 경우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아니라 ‘쟤’가 운거고 ‘쟤’가 사랑받는 것이니 “나는?”이라는 허전함이 곧 밀려온다. 누군가는 참으로 복잡하게 정의내리는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는 때때로 불행으로 때때로 축복으로 ‘내 일’이 된다. 정말 이해 안 되던 부모님의 훈계가 민망할 정도로 맞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기도 하고 언니의 정규직 전환 소식이 밥 먹다가 웃을 일로 우리 가족의 승전가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이고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관계,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언젠가 떠나갈 존재라고 믿는 그저 ‘오래되기’를 바라는 관계라면 ‘벗’이라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과의 이별을 배웅을 하고 누군가는 가족과의 사별을 맞이한다. 4년 전 우리 가족에겐 적어도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의 길 앞에는 ‘인정받지 못할 슬픔’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2년이 지나자 가족 구성원들은 씩씩하게 먹고 자신들의 일을 시작했다.

자녀들이 낮아진 성적표, 늦은 취업, 늦은 제대라는 장애물 달리기 종목을 뛰고 있을 때 어머니는 묵묵히 고기반찬들로 위로해주셨다.

부모님의 고기위로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일주일 내내 된장찌개 먹다 오빠가 일주일 한 번 기숙사 고등학교에서 오면 오리고기를 볶아 주셨다. 그때는 내가 중학색이라 집에 있었는데 된장찌개도 고기 넣고 끓이냐 된장을 적게 넣냐 많이 넣냐 쌀뜨물로 끓였냐에 따라 맛 차이가 있어 일주일 내내 같은 맛의 된장찌개를 먹은 건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밥을 잘 하셔 밥도 맛있었다. 그 밥에 뜨끈한 된장찌개 한 숟가락 적셔 먹으면 속이 든든해졌다.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기숙사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도 다르진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취를 오래 하다 보니 누군가가 하는 설거지 소리 누군가가 텔레비전을 보는 소리 누군가가 씻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져온다.

누군가와 같이 살다보면 양보할 일이 참 많아진다. 누군가가 국자로 국을 푸면 난 그 시간을 기다려야했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까지 기다리다 나의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래서 서로의 시간을 양보하는 ‘식사’를 배웠다. 같이 먹는 밥이 ‘맛’있어졌다.

사람은 자연에서 나약해서 무리를 짓는 본능이 생겼다고 들었다. 그럼 사람이 자연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된 현대는 죽음에 다가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무리는 아닐까 추측해본다. 서로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식사는 따뜻한 밥의 온기처럼 안정감을 준다는 뜻이 된다.

당신의 누군가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