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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샬럿 Feb 14. 2017

비극 한가운데, 비극

<시학>, <모비딕> 그리고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대학교 2학년 때 연극학과 수업을 들었다. 자유전공이었다. '서양고대연극사'라는 이름의 그 수업은, 학기 내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커리큘럼으로 진행됐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학교 연극학과는 연기 전공과 연출 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업은 거의가 연출 전공 쪽 학생들이었고, 나와 내 친구는 (확실히)전무(아마도)후무한 타과생이었다. 교수님은 여러 학교로 출강을 다니시는 다소 젊은 분이셨다. 양 볼이 꺼지고 턱이 조금 내려온 얼굴의 위에 붙은 형형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말씀이 많은 분이셨는데, 말 많은 사람들의 흔한 단점이자 약점인 쓸데 없는 말만은 신기하게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범람하듯 터지는 그 많은 말 모두에 고밀도의 지식이 걸쭉히 들어차 있었다. 언어 하나하나에 치열한 공부의 흔적이 묻어났다. 여러모로 놀랍고 존경스런 분이었다.


3시간짜리 수업은 도합 30분 남짓의 발표와 2시간 20분쯤의 강의로 채워졌다. 워낙에 오래 전 책이다보니 발표래봤자 특출날 것이 없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이전에 정확한 해석이 더 중요했다. 그때만 해도 연극학과 수업엔 팀플이란 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흔한 핸드아웃도 없이, 학생들은 교탁 위에 책을 놓고 나름의 해석을 곁들이며 문장을 줄줄 읽어내려갔다. 해석이란 것도 대개는 지극히 자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온전히 이해하기에 3천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새로운' 시각을 칭찬하시면서도, 처음부터 다시 내용을 해독하는 편을 택하셨다. 나는 샤프로 얇게 그어두었던 밑줄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 빨갛고 파란 모나미 줄을 다시 긋곤 했다. 카랑카랑한 맛이 있으면서도 극적인 데가 있는 교수님의 목소리를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활자를 딛고 날아오르곤 했다.



그러니까 그 책을 다시 읽은 건 딱 10년 만인 셈이다.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땐 그렇게도 낯설었던 활자들이, 삼백 분의 일만큼의 시간을 지난 지금의 내게 과연 얼마만큼의 양각으로 돋아올라 줄 것인지. 시간에 휩쓸려 유실돼 버린 내용의 조각들을 맞추고 싶기도 했다. 비극이야말로 인간의 고귀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의 양식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갈에, 내가 혹시나 잊어버리거나 곡해한 부분은 없는지. 손때가 앉은 낱장 위에 새겨진 밑줄을 좇으며 나는 조금 안도했다. 얕았을지언정 오해하고 있었던 건 없었다. 플라톤과는 새삼 달랐던 그의 예술론도, 비극의 조건을 꽤나 체계적으로 짚었던 특유의 시론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젠 활자들에 한결 양감이 가미돼 있단 점이었다. 교수님의 손길을 빌려 어르고 달래야 겨우 발걸음이나 뗄까 싶었던 것들이었는데. 시간을 건넌 활자는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의식의 한 자리를 자연스레 차지하고 있었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p.49)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정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pp.51-52)




사실 <시학> 재독의 계기는 <모비 딕>이었다. 1월에 완독한 작품이었다. 책의 뒷표지에 '세계 3대 비극'이란 소개가 붙어 있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 함께 거론됐다. 전자는 워낙에 좋아해 몇 번이고 읽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셰익스피어를 읽을 동력이 좀체 생기지 않았다. 3천 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5백 년 전의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는 것이 더 힘들다니. 하지만 신년의 힘은 대단했다. 세계 3대 비극이란 글자를 접하고서, 드디어 셰익스피어에 도전해보자 마음 먹었다.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4대 비극을 모조리 뽑아 읽었다. <시학>과 셰익스피어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 우위였던들 간발이었을 것이다. <모비 딕>부터 <시학>까지, 1월말은 줄곧 비극 시리즈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고. 오늘날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희극은 인간의 악한 면모를 따른 반면 비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식이 기본적으로 그랬다. 게다가 당시 희극이란 모욕에 가까운 풍자 혹은 성적 희화화가 빠지지 않은 소극의 측면이 강했던 반면, 비극은 '시'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였던 탓도 있다. 격조 높은 풍자극으로 문학의 역사를 뒤바꾼 후손들을 알았더라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적이 민망해하지 않았을까. 다만 문학의 산 한가운데 대작으로 추앙받는 작품 대다수가 비극의 범주에 든다는 점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그 중심에 셰익스피어가 있다. 그의 비극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참 비극'의 집약체다. 통일성과 개연성을 놓치지 않은 탄탄한 플롯은 물론, 비범하고 선량하지만 본의 아니게 악에 휘말려버리는 인물, 역동적인 운율로 문학성과 생동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문장까지. 플롯의 3요소인 급전(急轉)과 발견에 파토스까지 이야기 전반에 어우러져 있으며, 상황에 부득이하게 끌려가기보다 인물의 '착오'가 이야기의 주축을 이룬단 점에서 슬픔을 자연스럽게 극대화한 비극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문법을 가장 충실히 따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비극이란 그것을 읽을 때조차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것처럼 광경이 생생히 그려져야 한다고 했다. 셰익스피어가 <시학>을 읽었는진 모를 일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존재를 알았다면, <시학>의 지분 대부분은 분명 소포클레스가 아닌 셰익스피어가 차지했을 것이다.


네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햄릿>일 터다. 덴마크 왕자 햄릿의 복수와 비극, 오필리아를 향한 사랑이 처절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비극의 계기는 어머니이자 덴마크 왕비인 거트루드와 삼촌 클로디어스의 부정. 그의 간교에 넘어가 왕이었던 아버지 햄릿은 살해당했고, 클로디어스는 사실상 찬탈에 가까운 승계를 하게 된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통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복수를 다짐하지만, 점차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운 광기에 시달리게 된다. 거트루드의 침실에서 본의 아니게 재상 클로디어스를 죽인 후, 그의 딸인 오필리아는 광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햄릿 역시 재상의 아들인 레어티즈의 칼에 최후를 맞는다. 어디 플롯 뿐인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 숱한 명문의 근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 자는 것뿐일지니, /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 꿈꾸는 것일지도 ― 아, 그게 걸림돌이다. /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 /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pp.94-95)


하지만 가장 몰입해 읽은 건 <오셀로>였다. 셰익스피어 비극 중 가장 서사력이 뛰어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극의 배경은 베니스와 키프러스이며, 이 공간들을 따라 플롯의 양상도 확연히 달라진다. 무어인 오셀로가 심복인 이야고의 간계에 빠져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기어이 목을 졸라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로만 보면 현대판 막장 드라마의 시초격이래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작품이 주는 공명은 굉장하다. 오셀로는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는 장군이지만, 흑인 혈통이라는 데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영웅의 아픈 점을 끈질기게 물고 들어가는 이야고 식 간교의 촘촘함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그토록 건장하고 듬직해 보였던 오셀로가 형편 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전혀 과장 같지 않은 이유다. 열등감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해 가는 모습을 그리는 필치엔 외경심마저 든다. 진실에의 배반 혹은 은닉이 빚어내는 비극의 정점에선 문장을 따라 숨을 참게 되며, 데스데모나의 단단한 사랑이 비극의 절벽에서조차 숭고하게 빛나는 장면에선 진심의 힘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모든 것을 깨달은 오셀로의 절규가 결코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에게서 우리 모두가 아프게 비치기 때문이 아닐까.


누가 자기 운명을 다스릴 수 있답니까? /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 / 무기를 가졌다고 겁내진 마십시오. / 여기가 제 여정의 끝이고 목표이며 / 가장 먼 항해의 바로 그 표적이랍니다. / 움츠리고 물러서요?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 오셀로의 가슴을 갈대로 찔러봐요, / 그는 물러납니다. 오셀로는 어디로 가야지요? (p.194)


오셀로의 사랑은 데스데모나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다. 작품을 번역한 최종철 교수에 따르면, 오셀로의 사랑은 "생성 단계부터 허구에 의존"한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호의를 얻는 방식은 일방적인 이야기다. 그는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인생, 전장터에서의 일화를 데스데모나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녀의 존경심을 산다. 둘의 관계를 형성한 것은 오직 오셀로의 말들일 뿐, 데스데모나의 것은 없다. 그런 건 대화가 아니다. 때문에 이 관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실체를 기반으로 지어지지 않았단 점에서는 숭고해 마지않은 데스데모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오셀로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단 그가 겪은 '위험'을 경외한 것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했다기보다 자신의 위험에 반응한 그녀의 '동정'을 사랑했다. 상상을 딛어오른 사랑은 내구성이 약했다. 뜨겁기만 한 채 단단하지 못했던 애정은 작은 의심에 무너지고 광기에 찢겼다.




작품의 주축 감정이 허구에서 기반했다는 점은 <모비 딕>과 닮은 데가 있다. 피쿼드 호의 선장인 에이해브가 거대 향유고래인 '모비 딕'을 향해 세우는 증오의 날 역시, 사실 실체보다는 허구에 가깝다. 일전에 선장은 그 고래와 대양 어딘가에서 맞닥뜨린 적이 있다. 악명 높은 모비 딕은 선장이 탄 보트를 박살내면서 그의 한 쪽 다리까지 절단냈다. 향유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 찬 에이해브 선장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 고래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오직 모비 딕을 잡기 위해 피쿼드호는 무의미한 항해를 계속 하고, 지쳐가는 선원들 사이에서 선장의 눈만이 날카롭게 빛난다. 모비 딕은 소설이 끝을 향해 치달을 때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백경'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160장이 넘는 분량 중 마지막 단 한 장, 그마저도 끄트머리다. 그러나 고래는 가히 충격적인 실체로 소설의 수면을 박차고 튀어오른다. 이 점이 <오셀로>의 사랑의 허구와는 명백히 다르다. 모비 딕은 허구이자 상상이 빚어낸 괴기보다 더욱 파괴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소설의 모든 것을 끝장내버린다.


응당 이뤄져야 할 것들, 손에 들어와야 할 것들의 배신. '없음'으로의 귀소. 이 점에서 <모비 딕>은 <리어 왕>과도 궤를 같이 한다. 번지르르한 말에 속아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딸을 저버린 아버지 리어는, 결국 모든 영예도 잃고 딸 코딜리아마저도 죽음에 빼앗기고서야 그녀의 진심을 헤아린다. 뿐만 아니다. 두 소설은 '응당 이겨야 할' 세력의 처참한 패배로 끝난다. <모비 딕>은 응당 잡혀야 할 '리바이어던'을 세 번의 시도에도 끝끝내 잡지 못한다. 외려 그 '괴물'로 인해 모든 것이 무(無)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 버린다. <리어 왕> 역시 패배의 기록이다. 승리해야 할 선의 세력은, 결국 두 딸의 욕심과 계략에 무릎을 꿇고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코딜리아의 "없음"엔, 리어 왕이 여태 누려왔던 '있음'의 풍요로움이 가지지 못한 무한의 의미가 있었다. 혹자는 리어 왕의 고통에 어리석음의 정당한 대가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단 그만 그럴까. 말로 채 옮길 수 없는 무언가들을 외면당하고 외면하는 삶에,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특히 물물교환이나 등가의 원칙 따위 자본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에이해브의 욕심은 또 다른 비극인 <맥베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반역자를 물리친 스코틀랜드 왕국의 영웅 맥베스가 권력에 눈이 멀어 왕위를 찬탈한 뒤 몰락해가는 과정은 필시 <모비 딕>과는 다르다. 그러나 두 소설의 중심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돋아나는 통제 불가능한 욕망을, 어찌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뱅코 기사의 충절을 비교하며 맥베스에 손가락질하고, 에이해브의 자기파괴적 집념에 야유만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중 누가 쉬이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구나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품으며 살아간다. 그들에겐 그것이 단지 그 정도의 욕망이었을 뿐이다.




"나는 폭풍 속에서 돛대가 부러진 군함을 끄는 밧줄처럼 팽팽히 긴장되어 있고, 반쯤은 궁지에 빠진 느낌이다.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끊어지기 전에 우지끈 소리를 낼 것이다.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에이해브의 밧줄이 아직 자신의 목표를 악착같이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p.667)


"자신의 목표를 향해" 밧줄을 끌어당긴다고 호언장담하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모비 딕>의 끝은 초라하고 고요하다. 새삼 '일개' 향유고래를 칭한 제목이 묵직하게 가슴에 닿아오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다. 소설은 심연을 감춘 맑은 바다에 흩뿌려진 태양의 잔해처럼 영롱한 비유와 잠언들로 빛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결말은, 그 아름다운 문장마저도 단숨에 삼켜버린다. 모든 것을 허무로 몰아넣은 이 '리바이어던'이 현실의 독자에게 주는 무게감은 가히 충격에 가깝다. 


소설이 워낙에 방대하다보니 메타포의 길도 몇 갈래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해석도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독자는 묻는다. 40여 년에 걸쳐 모비 딕을 쫓았다는 에이해브의 집념이, 그저 광기 혹은 증오를 넘어 과연 어느 것에 가까운 형체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그의 인생은 무엇이었는지, 그는 무엇으로 살았는지도. 700페이지를 거뜬히 넘기는 대작을 시간을 들여 완독했다는 후련함보다, 모비 딕과 함께 솟아오르며 결정처럼 떨어지던 파도와 같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생각들에 막막한 침묵이 앞섰다.


<모비 딕>은 소설 곳곳에 비극의 악장을 차용했다. 일정한 흐름을 타고, 몇 장 건너 몇 장은 형식적으로 연극과 같은 문장 기법을 쓰고 있다. 장의 앞에 연극의 지문처럼 상황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고, 고대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합창부가 존재한다. 얼핏 작위적일 수 있는 각종 장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며 극적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비극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허먼 멜빌은 그로써 완전한 비극의 길을 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고 셰익스피어가 꽃을 피운 그 길에.




비극은 '미래'에 대한 언질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는 언어들이 포진될 때, 미래를 담지 않은 말들의 모퉁이에 이야기가 걸려 넘어질 때, 비극은 완연한 슬픔이 되어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파토스'의 의의다. 인간사에 맞닿은 이야기를 통해 숭고한 슬픔을 맛보고 나면, 반대급부처럼 생을 향한 의지가 샘솟는다. 인간은 이것으로 고귀해진다. 기원전의 철학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오롯이 슬픔에 집중하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끝조차 보이지 않는 비극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니 셰익스피어니 모비 딕이니, 비극을 읽는 것조차 사치 같았다. 까닭 없는 죄책감으로 활자를 마주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이 비극의 끝에도 파토스가 있을까. 요즘처럼 그것을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때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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