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t & Grace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나를 타인과 비교하고 작아지게 할 때도 있지만, 머물러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전문가의 완벽한 사진보다 지인이 직접 찍어 올린 사진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그 사진 속에 담긴 사람의 시선과 덜 완벽해서 느껴지는 친근함 때문일 것이다.
최근 장시간 운전 끝에 미팅을 다녀온 지인의 포스팅에서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건물을 보았다. 그녀는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Patina, 퇴색한 것의 아름다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본 듯 한 색을 지닌 세월의 흔적이, 한국의 오래된 건물 위에 그윽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코발트색 하늘이 건물 외벽의 높낮이가 만든 구멍사이로 흘러내려 내 마음의 빈틈까지 채워주는 듯했다. 시에나(Sienna) 컬러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이 건물이 품고 있는 색에 어떤 이름이 어울릴지 고민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모더니즘의 흔적을 담고 한국의 햇살과 비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935년에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과 말 못 할 시련까지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덧바른 시멘트의 거친 질감은 원래의 페인트색과 어울리는 듯, 어긋나는 듯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월이 닳아 만든 흔적, 즉 ‘Time-worn’의 미학이었다. 지인이 선택한 ‘파티나’라는 단어 뒤에, 나는 나만의 이름을 덧붙여 보았다.
Grit & Grace (투지와 은총).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시간의 밀도가 너무나 견고했기 때문에 떠오른 단어였다.
세계 곳곳을 다니다 보면 지역마다 하늘색이 얼마나 다른지 놀라곤 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이 만들어낸 차이가 아니다.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태양빛이 공기 분자와 부딪혀 흩어지는 산란 때문이다. 공기가 건조하고 맑을수록 푸른 파장이 방해물 없이 신나게 움직이며 깊고 선명한 빛을 만들어 낸다. 반면 습기가 많은 곳의 하늘은 수증기에 빛이 흩어져 부드럽고 흐릿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장소마다 정해진 하늘의 디폴트 값이 있듯, 같은 재료로 지어진 건물이라도 그곳의 햇살과 바람, 시간의 레이어가 쌓여 만들어내는 흔적은 모두 다르다. 마치 풍랑을 겪은 배의 선체처럼, 닳아 있는 조각들이 모여 묵묵히 서 있다. 건물은 각 나라와 지역의 역사가 만든 하나의 증인이다. 말없이 서 있는 그 모습 자체가 백 마디의 글보다 더 담담하고 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곳이 스쳐 간 수많은 사람의 희로애락을 품은 건물이라면, 지금까지 잘 버텨준 그 시간 위에 분명 ‘Grace(은총)’ 또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색 ‘시에나(Sienna)’는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의 흙빛에서 왔고, ‘울트라마린(Ultramarine)’은 바다 너머(Ultra-marine)에서 온 보석 라피스 라줄리의 귀한 파란색이다. 인도의 푸른빛을 담은 ‘인디고(Indigo)’가 동서양을 잇는 푸른 통로였다면, ‘번트 엄버(Burnt Umber)’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탄(burnt) 흙을 닮은 대지의 색이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 짙은 어둠 속에서도 고귀한 선명함을 잃지 않은 이 색은 차분한 듯하지만 그 안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짙은 밤하늘 아래서 맞서는 긴장감이 숨어 있다. 18세기 베를린에서 탄생한 최초의 인공 합성 안료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인공적인 차가움에 매료된 이유를 뒤늦게 이해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하늘 아래, 다른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간다. 기쁨보다 버거움이 더 많았던 시간들이 남긴 닳고 해진 흔적 위에 오늘의 우리는 저마다의 색으로 서 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색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부식된 마음 한편에 시멘트를 덧바르며 버텨낸 시간의 색을 사진 한 장으로라도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거친 모래결이 드러난 채 서 있는 건물의 영혼처럼, 우리의 남은 시간에도 그 세월을 견뎌낸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Grit & Grace.
Img 001 : Home, 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