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마음의 절반

기억, 데이터, 그리고 우리가 헤어짐을 견디는 법

by Dear Ciel

“내가 하는 말 잘 기억해라.”


엄마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얼굴에 닿았다. 건성으로 내뱉은 나의 “네”라는 대답 속에 섞인 성의 없음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읽어내신 모양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손녀의 약한 몸을 걱정하시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몸에 좋다는 것은 이유를 묻지 않고 삼켜야 했다. 건강에 좋은 것들은 대개 맛이 쓰거나 거부감이 있다. 내게는 육고기가 그랬다. 억지로 먹어야 했던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 내가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o-Vegetarian)으로 살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한약을 먹기 전 단식을 거친 후, 몸이 고기를 밀어내는 반응을 보였을 때 나는 비로소 기쁘게 ‘절반쯤’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렇게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서 자라온 내가 처음 독립을 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메로나 한 박스를 사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아이스크림 다섯 개를 한꺼번에 먹어 치웠을 때의 해방감이란. 입가에 달콤한 흔적을 묻힌 채 행복해하던 그때의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의 삶에서 울고 웃기를 반복하면서, 어머니의 잔소리는 전과는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듣기 싫었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말들이었기에 나는 그것을 ‘달콤한 잔소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예쁜 이름도 무색하게, 반복되는 말들은 각인되기보다 등 뒤로 흩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정색하며 “잘 기억해라”라고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온종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엄마의 주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득 드라마 ‘반의반’을 떠 올렸다.


정해인 배우가 나온다는 이유로 몇 번 보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 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본 탓에 AI가 등장하고, 헤어진 연인의 데이터를 통해 주인공이 어떤 답을 얻고자 했던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만 해도 AI는 지금처럼 일상적인 도구는 아니었고, 나 역시 그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쳤다.


불과 몇 년 사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AI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질문을 하고 답을 얻고, 일을 함께 한다. 기술을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그것이 내 일상의 빈틈을 메우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젠가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위해 남기고 싶은 말을 기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가르쳐주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준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함께 속상해하고 또 응원했다.


지금이라면 그는 아마 다른 도구를 선택했을 것이다. 카메라 앞이 아니라 AI와 마주 앉아, 훨씬 고된 작업을 이어갔을 것이다. 영상에 담았을 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투와 성격까지 인공지능에게 가르치며, 자신이 떠난 후에도 아이가 길을 잃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정교한 데이터를 남겼을 것이다.


아이는 영상이 아닌 모니터 앞이나 핸드폰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 또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은 “아빠라면…”이라는 전제로 답을 하겠지만, 아버지의 성향과 결을 따라 대화를 이어가며 비어있는 시간을 채우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질문이 떠 올랐다. 한 사람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결을 안다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확률의 문제로 예측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입력해 얻는 답보다 더 구체적일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우리는 특정 행동뿐 아니라 삶의 방향까지 가늠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래를 알고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나 역시 챗 창을 열고 질문을 던져 보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들쑥날쑥한 마음도 예측할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불규칙해 보이는 행동 속에도 각자만의 궤적과 리듬이 있으며, 말과 말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면 소음처럼 느껴지던 감정 속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대답이 한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심리학을 전공한 전문가나 상담가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되던 어긋남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은 자연스럽다. 모든 인연에는 만남이 있고, 언젠가는 헤어짐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당연한 순리조차 어느 날은 낮은 회색빛 구름처럼 내려앉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누군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어떤 이성적인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결국 ‘반의반’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떠난 이가 내어놓을 정확한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마음의 끈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헤어짐이라는, 반듯이 건너야만 하는 다리 위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가 남긴 마음의 조각, 반의반이라도 붙잡고 기억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애도의 방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Img 001 : Woman at a Window, Caspar David Friedrich,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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