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빛이 되는 시간

얼음 속에 핀 서리꽃의 미학

by Dear Ciel

휘빈캐( Hyvinkää)의 낡은 집, 한 여인이 창백한 빛이 떨어지는 작고 낡은 공간에 서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자신도 적응하지 못한 나이 든 육체와, 그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이는 가난의 흔적을 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 캔버스를 바라본다. 팔레트 위에는 흰색과 검정, 그리고 북유럽의 겨울을 담은 푸른색만이 남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어머니의 형상을 지워내고, 캔버스 속 인물도 지워낸다. 장식과 소란스러움을 밀어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텍스트가 아닌 오브젝트에서 글이 읽혀질 때가 있다. 악기가 아닌 사물에서도, 불협화음 속에도 조화로운 멜로디가 들려올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선물이 되어 나만을 위한 단어가 된다. 그녀의 그림을 보았을 때도 그랬고, 그녀의 펜던트를 마주했을 때가 그랬다.


얼마 전, 헬레네 셰르프베크(Helene Schjerfbeck)의 그림을 우연히 마주했다. 작품 속 인물은 분명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대답 없는 그 얼굴을 향해 나는 계속해서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그들이 머무는 공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로 건너갔던 젊은 날의 화가는 회복되지 않은 신체적 한계와 경제적 어려움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노모를 돌보기 위해 돌아온 시골의 작은 집,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그 방 안에서 그녀는 오히려 자유롭게 자신만의 언어를 다듬어 나갔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얼굴들 속에서 오히려 단단한 구조가 보였고, 침묵의 무게 안에서 비로소 그녀의 이야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눈꽃이 사라지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는 것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마 필의 서리꽃, Frost flower 디자인이 떠오른 것은.


헬레네 셰르프베크가 캔버스 위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밀어내며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알마 필은 단단한 크리스털 안에서 장식을 덜어내며 빛의 통로를 열어두었다.


알마 필은 전설적인 보석상 파베르제(Fabergé)의 수습공으로 일했다. 외조카라는 배경 덕분에 남들보다 이른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과 세공이 철저히 남성의 영역이었던 시대였다. 공방의 보이지 않는 거친 시선들 사이에서 그녀가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재능과 노력, 그리고 인내 덕분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고 익힌 감각 위에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가며 묵묵히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운명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중요한 고객이었던 에마누엘 노벨이 ‘여성에게 줄 흔하지 않고 세련된 선물’을 주문했을 때, 바쁜 공방의 일정은 그 기회를 이름 없는 수습공 알마 필에게 주었다. 어쩌면 아무도 그녀에게서 멋진 디자인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다른 디자이너가 작업을 할 수 있을 시간을 벌기 위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를 그 기회가 그녀에게 왔다. 알마 필은 고민에 잠긴 채 책상 앞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겨울의 입김이 만들어 준 '서리꽃'이었다. 보석의 화려함이라는 고정관념을 잠시 괄호 안에 묶어두고, 그녀는 창문에 맺힌 얼음 결정에 집중했다. 그렇게 탄생한 스케치는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눈꽃으로 내려앉은 펜던트로 완성되었다.


그녀는 화려한 금과 값비싼 유색 보석으로 빈틈없이 채우는 대신, 투명한 크리스털을 통해 빛이 머물다 갈 ‘여백’을 디자인했다. 그것은 차가운 얼음 속에 갇힌 듯하나 결코 얼어붙지 않는 빛의 생명력이었다. 장식의 화려함을 걷어내고 남겨진 투명한 마음. 알마 필의 디자인은 화려한 보석보다 더 깊고 아련한 여운을 남겼다.


두 예술가는 침묵을 빛으로 승화시켰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작품 속에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시간을 숨겨 두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발견하는 누군가를 초대한다. 찬 바람에 붉어진 손과 얼굴을 잠시 녹이고, 머물다 갈 수 있도록. 그들이 마련해 둔 투명한 방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겨울을 사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AlmaPihl.png Snowflake Pendant, Design by Alma Pihl (Sotheby’s)





Img 001 : Self-Portrait, Helene Schjerfbeck, 1912, Finnish National Gallery, Ateneum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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