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역설의 틈’
최근 유튜브에서 주목받고 있는 독특한 음악 채널이 있습니다. 이 채널에는 이름도,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콘텐츠마다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할 수 있는데, 배경화면은 밈으로 유명한 '개구리 페페'를 재해석한 이미지만 사용합니다. 각 콘텐츠에는 어떠한 설명도 붙어있지 않습니다.(https://youtube.com/@user-d1n6v?si=DvZ5QJBidV_QO1S9)
이름조차 없어 구독마저 운에 맡겨야 하는 무명의 유튜브 음악 채널은 개설 2개월 만에 구독자 50만 명을 눈 앞에 두며 순식간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무명 채널의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과잉된 셀프 마케팅 시대에 오히려 정반대 전략으로 유명해진 다른 사례들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익명성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성공한 사례는 대중문화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미술, 음악, 문학 등의 분야에서 창작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거나 가명으로 활동하며, 작품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익명성은 창작 과정에서 자유를 제공하며, 팬들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창작된 작품의 본질에 몰입할 수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익명성은 특히 예술적 표현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 유용합니다. 예를 들자면, 거리 예술에서는 법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익명성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문학에서는 가명을 쓰는 저자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작가 개인의 삶과 작품의 해석을 분리하려는 의도로 사용될 수 있겠죠.
뱅크시(Banksy)는 영국 출신의 거리 예술가로 익명성을 극대화시킨 정치적이고 풍자적인 그래피티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공공 장소에서 발견되며, 종종 반전, 반자본주의, 반체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7년 브리스톨에서 그린 <The Mild Mild West>는 테디베어가 폭동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을 묘사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뱅크시의 정체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완벽한 익명성은 뱅크시라는 예술가에게 신비감을 더하고 작품 가치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지금도 그의 작품은 2021년에는 18.5백만 파운드, 한화 약 352억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는 익명성이 예술 시장에서의 가치를 어떻게 증폭시킬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음악계에서도 익명성을 최대한 활용한 사례가 있죠. 지난 2021년에 해체를 선언한 일렉트로닉 뮤직의 최고 듀오 ‘다프트 펑크 Daft Punk’ 입니다. 로봇 같이 보이는 헤드기어를 쓰고 장갑까지 끼는 등 누군지 모르도록 꽁꽁 모습을 감춘채 음악 활동을 해 온 ‘다프트 펑크’는 하우스 음악이라고도 불리는 일렉트로닉 장르를 주류로 올려 놓은 위대한 뮤지션의 반열에 오른 대가입니다.
다프트 펑크는 토마 방갈테르와 기마뉘엘 드 오맹크리스토 두 프랑스 국적의 고등학생이 결성한 ‘달링’ 이라는 밴드가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의 첫 앨범은 평론가들에게 처참한 혹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혹평으로 들었던 단어를 재미있어하며, 밴드 이름마저 그 단어를 차용한 ‘다프트 펑크’로 개명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로봇 의상을 입고 공연하며 정체를 숨겼으며, 이는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게 하고자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다프트 펑크는 다수의 히트곡을 포함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대중음악 최고 권위의 그래미상을 6회 수상하면서 21세기 최고의 음악 아티스트 자리에도 오릅니다.
그들의 익명성은 1999년부터 LED 헬멧과 의상을 통해 공연하며 시작되었는데요. 사실 그들이 이렇게 모습을 숨기게 된 의도는 단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팬들은 다프트 펑크의 음악 자체에 집중하게 했으며, 2021년 2월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기 전까지 이 전략은 그들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문학에서도 익명성의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라는 가명의 이탈리아 소설가는 <나폴리 4부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정체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편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맨부커상 후보로 경합했던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992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익명성을 유지하며, 이런 철저한 익명성은 창작 과정에서 무한한 자유를 주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익명성에 근거해 진행중인 그녀의 작품은 전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2016년 타임지는 그녀를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도 선정했습니다. 그녀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몇 몇 추정 인물이 언급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대중문화계에서 순수한 익명성을 활용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드물며, 대신 '부캐'라는 새로운 형태의 멀티 페르소나를 활용하는 독특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본래의 정체성을 완전히 숨기는 대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익명성과 부캐 모두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관된 모습이어 한다는 강요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인식의 결과물이라 보여집니다. 하지만 종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젼혀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이유가 단순히 색다른 재미를 위한 것이라면 본래의 의도에서 매우 벗어나는 의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익명성은 단순한 유행이나 마케팅 수단이 아닌, 창작자 내면에 자리한 다양한 자아를 인식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발전해야 그 의미가 충분하리라 봅니다. 결국 '무명'의 전략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 독특한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이라는 사회 속에서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 작품과 메시지 자체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무명이 가진 특별한 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