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를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5년 가까이 커리어 코치로, 그리고 1인 기업가로 일하면서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하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프로필 한 줄에 나를 담아야 하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기능적이고 정답을 요구하는 물음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내가 업에서 달성한 숫자는 직업적인 정체성이 되고 그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우리는 더 큰 스케일을 욕망합니다.
하지만 심리학과 뇌과학은 말합니다. 정체성은 완성된 정의가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써 내려가는 이야기라고요.
정체성은 단일한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환경과 역할, 감정,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수정되고 조정되는 문단에 가깝습니다.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Dan McAdams)는 이를 '서사적 자아(narrative identity)'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엮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라는 감각을 발견합니다.
그 일관되어 보이는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일관된 실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뇌는 (뻔뻔하게도!)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유연하게 조정합니다. 신경과학적으로도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환경에 반응하며 업데이트되는 '자아감의 환상'을 살아갑니다. 정체성이란, 말하자면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자아의 유연성"이 정신건강과 회복탄력성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자기개념 명확성(self-concept clarity)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을 경우 변화에 대한 저항과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쉬운 반면, 적당한 유연성을 지닌 사람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적응하며 성장 지향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자기 자신을 단 하나의 타이틀에 가두지 않고, ‘지금의 나’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해 나가려는 태도가 정체성의 건강함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겠죠.
코칭 현장에서도 이러한 정체성의 유연성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최근 만난 내담자는 30대 후반의 전문직 여성이었습니다. 전직을 고민한다는 그는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치님 사실 저는 편의점 알바도 괜찮거든요. 오히려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하하.”
처음엔 그 말이 자신감의 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경력이 짱짱해도 자신감은 없는,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이 사실은 운에 가까웠다는 이른바 가면증후군을 가진 경력직 여성을 코칭에서 만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첫 코칭은 오히려 코치인 제가 지금까지의 내담자의 경력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과 서사에 집착하는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내담자의 단단한 내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력을 귀하게 여기되, 그것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제든 새로운 역할을 탐색할 수 있다는 내면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태도는 단순한 자신감 이상의 자존감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마치 스무살의 대학생의 커리어를 탐색하듯 내담자와 함께 직업과 흥미와 강점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조직에서 독립한 지 5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합니다. 지금까지 코치, 퍼실리테이터, 교육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해 왔지만, 그 중 어느 하나로도 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정체성 역시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즐거운 고민입니다.
요즘 저는 빵을 굽습니다. 말랑한 반죽을 손으로 치대고, 발효를 기다리고, 굽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잘 구워진 치아바타의 향기를 맡으며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베이커'로서의 내가 교차하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또 아이와 함께 어싱(맨발 걷기)을 하며 자연 속을 걷고 명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순간, ‘나’는 커리어가 아닌 삶 자체에 깊이 연결된 존재로 느껴집니다. 이때의 저는 '오후가 되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맨발로 황토를 걷는 사람'이라는 재미난 정체성을 입습니다.
이런 사적인 순간들은 댄 맥아담스가 말한 '서사적 자아'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정체성은 단지 직업적 역할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내가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무엇에 감응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포함하는 더 넓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개념 명확성을 완화하는 데 있어, 단지 유연한 태도를 갖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해보는 것입니다. 직업적 역할에 한정하지 않고,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자신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해 보는 시도는 스스로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고정된 자아 개념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나는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더 건강하고 탄력있는 자기 인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묻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역할을 살고 있는가? 그 역할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기대에 반응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어떻게 다시 써 내려가고 있는가?
정체성은 고정된 타이틀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살아내며 매일 덧붙여가는 이야기입니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써볼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어가 오늘도 '나'라는 사실이, 나를 지탱해주는 문장이 됩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