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를 감지하는 프리즘적 사고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양육 책에서 추천하는 방법을 시도하다가 실패할 때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적용했지만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이 질문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먼저 자책하곤 했습니다. 제가 일관성이 부족해서, 의지력이 약해서, 뭔가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아니라, 논리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요. 정확히는 논리 자체의 문제이기 보다 모든 논리는 모서리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생각의 틈을 넓히는 도구로서 직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나누고 싶은 도구는 논리와 주장을 통과시켜 숨겨진 모서리를 발견할 수 있는 '프리즘적 사고'입니다.
중학교 과학 시간, 프리즘을 들어 창가에 대보았던 기억 있으신가요? 순수하고 단일해 보이던 햇빛이 벽에 무지개 스펙트럼으로 펼쳐졌었지요.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문득, 논리도 빛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는 주장이 실제로는 다양한 층위와 예외, 맥락적 한계를 품고 있습니다. "항상 일관된 규칙을 제시하라"는 양육 원칙은 훌륭해 보이지만, 아이의 발달 단계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이 필요한 모서리가 있습니다. "감정을 공감해 주고, 내적 동기를 활용하라"라는 이론도 대상자의 의지와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모서리가 존재하지요.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해도 버그는 발생하는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논리도 현실에서는 모서리에 부딪힙니다.
양육과 리더십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처음 아이들을 키우며, 리더십을 공부하며 저는 고민이 많은데 그 책들은 명쾌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와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팀을 이끌면 성과가 향상됩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실천 과정은 달랐습니다. 책에서 말한 원칙들을 그대로 적용하면 되리라 믿었지만, 현실에서는 생각처럼 작동하지 않았지요.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비난하기도 했고, 원칙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는 양육에서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는 원칙을 적용했지만, 그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모서리들과 계속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이럴줄은 몰랐던' 상황 들속에서 허둥대다 너무나 화가나 애지중지 하던 육아서를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지요. 제가 논리에 모서리가 숨어 있음을 미리 발견했다면 그렇게 화가나지는 않았을텐데요.
프리즘적 사고방식은 단순히 주장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하고 현실적인 이해를 위한 도구입니다. 직관이 생각의 틈을 넓히는 도구라면, 프리즘은 그 틈 속에서 숨겨진 스펙트럼을 발견하는 도구이지요.
아인슈타인은 프리즘적 사고의 대가였습니다. 그 시대에 뉴턴의 물리학은 완벽한 논리체계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물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뉴턴 물리학의 '모서리'를 탐색한 것이지요. 이 질문이 결국 상대성 이론이라는 혁명적 통찰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완벽해 보이는 이론의 모서리를 발견함으로써 물리학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프리즘적 사고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대화 상대자의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보여도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참인가요?", "어떤 조건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마치 프리즘처럼 주장을 통과시켜 숨겨진 가정과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무지의 지'는 사실 모든 논리의 모서리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서리를 숨깁니다. 책의 저자, 이론가, 전문가들은 자신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예외와 한계를 축소하고 단순화하지요. 그들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제가 그 모서리가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프리즘을 생각의 틈을 넓히는 일상의 도구로 삼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번째는 프리즘을 '견지'해야 합니다.
모든 주장에는 숨겨진 스펙트럼(모서리)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논리는 한계가 많아, 적용이 안돼...라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주장에 대해 더 풍부한 이해를 위한 준비 자세입니다. 육아서를 읽고 제가 화를 내기 전에 단일하게 보이는 지금의 주장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논리의 경계를 탐색하는 '질문'하기 입니다.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상황은 무엇인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프리즘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뉴턴 물리학에 던진 질문처럼, 논리의 경계를 탐색하는 질문이 모서리를 드러내지요.
세번째는 모서리를 '자원'으로 인식하기 입니다.
발견된 모서리는 논리의 결함이 아니라 더 깊은 통찰로 가는 입구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 속에서 모순점을 발견했을 때 그곳을 파고들었듯이, 이제는 모서리를 만났을 때 그곳을 탐험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모서리는 더 균형 잡히고 현실적인 적용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으니까요.
지난 글에서 제가 소개한 직관이 생각의 틈을 넓히는 도구였다면, 오늘 소개한 프리즘은 그 틈 속에서 숨겨진 스펙트럼을 발견하는 도구입니다. 이 두 도구가 함께할 때, 우리의 사고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직관이 논리적 사고의 선로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해준다면, 프리즘적 사고는 그 가능성의 다양한 층위와 맥락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실천해 보니 되지 않는다고 육아서를 갖다 버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또는 어짜피 해봐도 안될꺼야 라는 회의감으로 리더십과 코칭 서적을 살펴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완벽한 논리를 찾아 헤매는 것 대신 모든 논리가 가진 모서리를 발견하고, 그 모서리를 통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 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합니다.
논리의 세계는 흑백이 아니라 무지개 스펙트럼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완벽한 확실성이 아니라,
그 모서리의 풍요로움을 받아들이는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논리는 모서리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서리에는 새로운 통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